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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비결 ? ‘한사이즈큰모자’를 쓰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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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만난 사람 =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항공연구(Aeronautics Research) 부문 최고책임자로 임명된 신재원(49) 박사(본지 1월 26일자 2면). 그는 NASA에서 동양인으론 처음으로 차관급인 국장보(Associate Administrator)가 됐다. NASA 소속 미국인 과학자도 통상 25∼30년 정도 일해야 갈 수 있는 자리를 NASA 근무 19년 만에 맡게 된 것이다.

신 박사는 26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속 승진의) 특별한 비결은 없다”며 “맡은 일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라고 자신을 낮췄다. 그러면서 “무슨 일을 하든 성실과 정직, 일관성을 포괄하는 말인 ‘Integrity’가 가장 중요하다. 그걸 지키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항공연구 부문 부국장보에서 승진한 그는 “항공 교통이 현재 안전한 수준이지만 그걸 보다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는 연구에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인류가 문명의 이기(利器)를 더욱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으려면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미래를 내다보고 연구를 해야 한다”며 “항공 연구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NASA의 연구 수준을 더욱 향상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중책을 맡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

“NASA엔 덩치가 큰 네 가지 핵심 조직이 있다. 항공 연구 부문 외에 탐사체계(Exploration Systems), 과학(Science), 우주활동(Space Operations) 부문이 있다. 우주활동 쪽은 우주선과 로켓 등을 직접 제작하고, 우주 탐험을 한다. 항공 연구 부문은 항공기 등을 만들진 않는다. 대신 항공의 미래를 위한 연구를 한다. 항공 수요가 늘면서 하늘에도 체증이 생기고 있다. 체증은 항공 교통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이다. 좀 더 안전한 항공 교통의 체계를 만드는 건 NASA의 중요한 임무다. 항공기의 안전한 운항을 위해 항공기 결빙(aircraft icing)을 방지하기 위한 연구도 해야 한다. 우리 부문엔 1200여 명의 과학자·기술자가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그들이 좋은 연구 업적을 낼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게 나의 업무다. 다른 정부기관, 민간연구소와 원활한 협력관계를 맺도록 매개 역할도 해야 한다.”

 -업적이 많아 상도 여러 번 탔다. 기억에 남는 업적을 소개한다면.

 “1994년 겨울 문턱에 시카고에 착륙하기 위해 공중에서 대기하던 아메리칸 이글사 소속 프로펠러 여객기가 추락, 70여 명이 사망했다. 그때 여러 전문가가 모여 사고 원인을 조사했다. NASA에서 파견된 나는 항공기 결빙 때문에 사고가 난 것 같다고 보고했다. 여객기를 조사한 결과 해당 업체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날개 부분에 결빙 방지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당국은 비슷한 기종의 비행기들을 점검, 결빙 방지 장치를 강화했다. 이후 유사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업체는 비용을 중시했다고 하더라도 엔지니어가 안전을 고려해 디자인을 제대로 했다면 그런 어처구니없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NASA에서 일하게 된 동기는.

 “초등학생 때인 1969년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봤다. 당시 NASA가 뭘 하는지도 잘 몰랐지만 TV를 시청하면서 ‘인류가 참 대단한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대학을 마치고 미국에 유학하면서 유체역학을 공부했다. 석사·박사과정 때 그 분야에 대한 NASA의 연구 결과를 많이 봤다. 그래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주저하지 않고 NASA의 문을 두드렸다.”

-동양인이 들어가는 데 장애가 없었나.

“89년 NASA에 신청서를 내자 산하기관 중 하나인 글렌 연구센터에서 채용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연방정부 공무원이 되려면 시민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나는 시민권이 없었다. 연구센터는 그해 8월 안에 시민권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불과 4, 5개월 안에 시민권을 받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아내가 버지니아주 출신 연방 하원의원 사무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찾아가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아내의 열성에 감동한 직원은 마침내 의원에게 보고했고, 의원이 힘을 써 준 덕분에 시민권을 제때 받을 수 있었다. 아내가 없었다면 오늘의 이런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신 박사는 82년 미국에 유학했다. 처음에 그는 두 가지 고충을 겪었다고 말했다. “영어도 문제였지만 미국 사회의 시스템을 잘 몰라 애를 먹었다.” 그는 은행에서 계좌를 만드는 데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미국 은행의 시스템이 한국과 다른 데다 금융 용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진땀을 뺐다”는 것이다.

석사과정에서 첫 과제가 주어졌을 때 개인용 컴퓨터를 다룰 줄 몰라 밤을 새운 기억도 있다고 했다. “한국에선 대학의 대형 컴퓨터만 이용했다. 대학에서 한 것은 컴퓨터용 OCR 카드에 펀치를 하고, 그걸 컴퓨터실로 가져 가 분석 결과를 페이퍼로 받아보는 게 전부였다. 그런 나에게 개인용 컴퓨터를 써서 숙제를 해오라고 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면서 숙제를 했는데 익숙하지 않아 밤을 새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퍼마켓에서 약 6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처음엔 바닥 닦는 일을 했다. 좀 익숙해지니까 상품 진열대를 정리하는 일을 시켰다. 그걸 하고 나니 계산대에 세웠다. 미국의 수퍼마켓에선 계산을 담당하는 종업원이 되기도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화제를 NASA로 돌려 다시 물었다.

-NASA에서 일하면서 많은 애환을 겪었을 텐데 소개해 줄 만한 게 있나.

 “글렌 연구센터에 막 들어갔을 때다. 당시 연구직 엔지니어를 보조하는 기술직 책임자가 은근히 스트레스를 줬다. 실험장인 결빙 터널에 사람이 손을 내밀고 있는 사진을 보며 토론하는데, 그 사람은 그게 내 손이라고 하면서 ‘간장이 묻어 있지 않느냐’라고 했다. 나를 겨냥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당신, 왜 박사라고 얘기 안 했어’라고 물었다. 영문을 모른 채 ‘굳이 그걸 알릴 이유가 없다’고 대꾸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의 태도는 달라졌다. 나에게 잘해 주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내 처신이 겸손하게 비쳤던 것 같다. 나도 거기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동양인이 NASA에서 관리자가 된다는 게 쉽지 않다고 하던데.

 “내가 들어갔을 때 ‘동양인은 유능하지만 자기 일밖에 모른다’는, 그런 고정관념이 있었다. NASA의 여러 동양인도 ‘미국인들이 우리를 관리자로 승진시키겠느냐’고 지레 생각하고, 좀 더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내 분야에선 미국인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실험도 열심히 했고, 논문도 많이 썼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 전념하니까 위에서 알아주더라. 95년 글렌 연구센터에서 처음 관리자급으로 승진했을 때 몇 사람이 경쟁했는데 위에선 나를 선택했다.”

-동료나 주변사람들에게 즐겨 하는 말이 있다면.

“여러 명이 출세의 이유가 뭐냐고 묻곤 하는 데 그때마다 영어로 ‘한 사이즈 더 큰 모자(one size bigger hat)를 써 보라’고 말한다. 자기 일 또는 자기가 속한 작은 부서의 업무만 보지 말고 좀 더 큰 조직, 나아가 NASA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라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한다. 그러면 다른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편협해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다.”

-한국이 항공우주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솔직히 한국의 사정을 잘 모른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선택과 집중을 잘해야 한다. 한국의 기술로 1위를 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신중히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하면 항공우주 산업도 조금씩 성장할 것이다.”

-한국에선 대학·대학원 진학과정에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하다.

 “이공계를 전공하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 아니냐. 정부와 기업이 문제를 직시하고 함께 노력하면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정부는 나라의 미래를 보고 이공계를 육성하는 정책을 펼 필요가 있다. 기업도 이공계 졸업자를 발전의 주력군으로 보고 대학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한민족은 우수하고 근면하기 때문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동기를 부여하면 어느 분야에서든 세계 일류가 될 수 있다.”
 신 박사는 이공계를 전공한 데 대해 자긍심을 느낀다며 이렇게 말했다. “엔지니어링을 잘 하면 인류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항공 안전뿐 아니라 교량의 안전에도 가장 중요한 게 엔지니어링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다면 이공계를 기피할 이유가 없다.”



신재원 박사는

1982년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 주립대(롱비치)에서 석사학위, 버지니아테크에서 박사학위(유체역학 전공)를 받았다. 미 항공우주국(NASA)의 지원으로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최고경영자 과정을 이수했다. 89년 NASA의 클리블랜드 글렌 연구센터에 들어간 뒤 능력을 인정받아 NASA 리더십 메달, 특별 서비스 메달, 그룹 성취상, 루이스 우수 성취상 등을 받았다. 2004년 워싱턴의 NASA 본부로 자리를 옮겼고, 항공연구 부문 부국장보(Deputy associate administrator)로 3년6개월간 일하다 이번에 차관급 국장보로 승진했다.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