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댓글 수백 개, 흔들릴까 두려워 처음엔 안 읽었지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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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 14면

사진=신인섭 기자

지난해 8월 인터넷 포털 업체 네이버가 블로그(blog.naver.com/wacholove)에 박범신 작가의 산악소설 ‘촐라체’를 연재한다고 발표했을 때, 포털 최초로 순수문학을 연재한다는 사실만큼이나 ‘아직도 원고지에 글 쓰는 작가’가 인터넷 연재를 한다는 것이 화제가 됐다. 환갑을 넘긴 작가가 ‘악플’(악성 댓글)을 견딜 수 있겠느냐는 염려도, 이모티콘이 넘쳐나는 귀여니류의 인터넷 소설에 익숙한 네티즌들이 정통 소설을 외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5개월 동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주 5회 꾸준히 연재한 결과는 클릭 수 120만. 순수 소설로 2만 부를 넘기기가 힘든 요즘 출판계 현실을 생각하면 “정통 문학작품으론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아니겠느냐”며 웃음을 섞는 작가의 농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구희령 기자의 ‘톡&톡’ 인터넷 연재소설 쓴 박범신

“나도 인기 작가로 단련받았기 때문에 흥행에 성공하려면 이렇게 해야겠다는 감은 있지요. 네이버? 일단 젊은 독자들이 많겠구나, 연애소설 같은 걸 좋아하겠구나….”
하지만 ‘촐라체’는 분명 히말라야 촐라체봉에서 조난당했다가 생환한 산악인들의 이야기인데? 작가의 눈에 장난기가 번진다.

“그렇지. 그런 걸 알면서도 남자 두 사람이 히말라야 산꼭대기에서 딱 1주일 동안 고생만 하는 얘기를 쓴 거지. ‘네이버이니까 나는 더 클래식하게 쓰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인터넷이라고 한 종류의 문화만 있어서는 안 되잖아요. 만날 햄버거·피자만 먹을 수 있나. 잘 차린 한정식 같은 것도 생각날 때가 있잖아요. 연재하면서 중학생 독자도 여러 명 만났어요. 실제로 젊은 사람들도 다양한 문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처음에는 ‘흔들릴까 두려워서’ 의도적으로 댓글을 읽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백 개씩 댓글이 달리니까 첨엔 읽을 엄두도 안 나더라고. 그런데 그렇게 독자들 반응을 볼 수 있으니까 긴장도 되고 흥도 나고 그렇데요. 나중엔 꼬박꼬박 다 읽어봤는데, 참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악플도 적지 않았다. 충남 논산이 고향인 그에게 ‘전라도 좌파’라고 악담을 퍼붓는 네티즌도, ‘촐라체가 글씨체 이름이냐’ ‘박범신이 진짜 작가냐’ ‘작가라면 초보겠지’라는 글도 있었다. 오랜만에 앨범을 낸 가수 이승철에게 네티즌들이 ‘나이 많은 신인이라 힘들겠다, 열심히 하면 당신도 동방신기 오빠들처럼 될 수 있다’고 했다는 얘기가 떠올라 기자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작가도 빙글거린다. “그런 애들은 ‘초딩’(초등학생)이에요. 큰아들은 화를 내고, 막내아들은 무시하라고 했지만 난 진짜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진짜 아픈 댓글이 있긴 있었죠.”

‘재미없다’는 한마디가 그렇게 아팠다고 한다. 상처받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네티즌들에게서 힘을 얻은 적도 있다. 하산 중이던 주인공이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러 다시 산을 올라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전문 산악인의 조언을 구하자 “현실성이 없다”고 말렸다. 답답한 작가가 “정말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느냐”고 게시판에 묻자 열화와 같은 리플이 달렸다. 열명 중 여덟 정도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지지했다. “그게 쌍방 소통의 하이라이트였다고 할 수 있죠. 사실 독자들이 안 된다고 해도 난 그대로 밀고 나갔겠지만….”

잘못된 산악 지식에 대해 전문 산악인이 짚어주는 지적이나 문장이 길다는 비판은 받아들였지만, 줄거리 등 본질적인 부분을 고쳐 달라는 요청엔 ‘작가는 독재자’라는 자세로 밀고 나갔다. 이모티콘도 쓰지 않았다. “귀여니류의 소설은 재미가 없어서 난 끝까지 못 읽겠더라”는 것도 이유이지만, 작가라면 기호의 힘을 빌리지 않고 문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철학에서다. 웃는 기호 ‘^^’만 딱 2번, 주인공이 쓴 산악일지 부분에서 사용했다. “실제로 사람들이 일기장 같은 데 그런 기호를 쓰니까요.” 단순 명쾌한 설명이다. 사실 그도 일상생활에선 ‘^^’나 ‘T.T’ 같은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웃는 표시 있잖아요, 그거 보면 마음이 밝아지지 않아요? 하지만 소설은 문장으로 말해야지.”

그는 원고지에 사인펜으로 소설을 쓴다. 네이버에 연재할 땐 그가 손으로 쓴 원고를 다른 사람이 타이핑해줬다. 그런 그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 ‘독자와의 대화’ 게시판엔 직접 글을 올렸다. 비록 자판을 들여다보며 한 자 한 자 ‘독수리 타법’으로 쳐야 했지만 독자와 소통하고 싶어서다. “e-메일도 못 쓰신다고 들었는데요?” 기자가 묻자 “e-메일 사용한 지가 벌써 10년”이라고 못박는다. 그는 1993년부터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일했다. 젊은 제자들이 e-메일 계정도, 홈페이지도 다 만들어줘 남들보다 일찍 시작했다고 한다. “학생들한테 편지 오면 ‘회신’ 버튼 눌러서 답장은 하지.” 그렇다. 아직도 박 작가는 자신이 ‘먼저’ e-메일을 보내지는 못한다.
1946년생.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인터넷 연재’라는 파격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에게서 젊은 기운을 받아서일까?

“전~혀. 내가 훨씬 더 기가 센 것 같아.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눈치를 봐요. 목숨 걸고 달려들지 않고, 자꾸만 자기한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재보려고만 하거든. 그래서 ‘촐라체’를 연재한 거예요. 젊은이들이 도전정신, 야성적인 본능, 이런 걸 되찾았으면 하고.”

작가는 원하던 것을 이루고 만족한 눈치다. 고료도 적잖게 받았다. 출판사에서 받는 액수의 2~3배는 된다고 한다. 가뜩이나 ‘문학의 위기’라고들 하는데 시장 하나를 열어놓은 것이 흐뭇하다. “다음, 야후, 엠파스… 다 했으면 좋겠어. 예전엔 신문 소설로 적어도 작가 스무 명이 먹고 살았거든. 전자책, 음성책, 소설낭송회 다 좋아요. 내용이 문제지, 형식은 독자에게 맞춰가야 하는 거거든.”

이번 겨울방학엔 컴퓨터 학원도 다녀볼 생각이다. 그의 팔뚝에 그려진 상어 문신처럼 앞으로도 인터넷 바다를 헤엄쳐 나가는 작가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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