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의 국토박물관 순례] 13. 경주 남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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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장사터 삼층 석탑은 백옥 같이 흰 빛의 자태를 드러내며 경주 남산을 찾은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앙증맞고 야무진 지붕선을 가진 이 탑은 앞산의 훤칠한 경관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조용철 기자]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에 들어서면 드넓은 서라벌 들판 남쪽으로는 강변의 모래톱 모양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가 눈앞에 다가온다. 아침나절이면 햇볕을 등지고 있어 산은 검고 두텁게 보이지만 정오가 지나기 무섭게 밝은 햇살을 받은 화강암 준봉들이 영롱한 빛을 발한다. 이 산을 신라인들은 남산이라 불렀고 혹은 큰 자라 같다고 해서 금오산(金鰲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주 남산은 뭇사람들이 찬탄해 마지 않는 신라 불교미술의 보고다. 경주 남산은 남북이 8㎞, 동서가 4㎞, 금오산 정상이 468m이니 결코 웅장한 산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산자락의 굴곡이 심하여 용장골.약수골.절골.탑골.불곡.삼릉계 등 36개의 골짜기가 부챗살처럼 퍼져 있고, 그 골짜기마다 탑과 불상으로 가득하다.

현재까지 확인된 절터가 55곳, 불상이 59체, 석탑이 38기에 이른다.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한 유적만도 12점이나 된다. 산 전체가 산상의 야외 불교미술 전시장이라고 해도 한치의 과장됨이 없다. 하여 윤경렬 선생은 "남산을 보지 아니했다면 경주를 봤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경주 남산에는 답사자를 위한 친절한 길 안내판이나 이정표가 없다. 탑이나 불상 같은 유적 앞에는 어떤 보호철책이 둘러쳐져 있는 것도 없다. 이를 두고 혹자는 방치와 무관심이라고 투정을 말하기도 하지만 기실은 남산을 있는 그대로 보호하려는 더 높은 뜻이 있는 것이다. 거창하게 말해서 경주 남산은 신라문화유산의 마지막 보루이자 최후의 히든 카드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경주를 다녀가는 사람의 열의 하나, 백의 하나만이 남산에 오를 뿐이며 길라잡이 없이 남산에 오르다가는 불상 구경은커녕 길을 잃기 십상이다. 오직 마음과 성의가 거기까지 닿은 사람, 그럴 명분이 있는 사람들만이 남산을 답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최근에 남산을 다녀온 것은 지난 늦가을 명지대 미술사학과 경주 답사 때였다.

남산의 불적들은 여러 골짜기로 퍼져 있어 답사코스가 분산되어 있으므로 하루 한두 곳을 보기도 바쁘다. 그래서 나는 삼릉계 코스, 용장사 코스, 칠불암 코스 세 개를 하나로 묶은 코스를 택한다. 삼릉에서 출발하여 상사암에 오르고 금오산 정상을 지나 용장사터에 다다라 점심을 먹고는, 용장골로 내려와 다시 산을 타고 올라 신선암과 칠불암을 거쳐 남산 쌍탑으로 하산하는 것이다. 대개 오전 9시에 출발하면 오후 4시쯤 떨어진다. 7시간 산행이니 짧지 않은 거리인 데다 용장사터로 가자면 바위벽을 팔.다리.엉덩이를 모두 쓰며 내려가야 하고, 신선암 마애불로 가자면 천길 낭떠러지를 발 아래 두고 바위벽에 붙어 맴을 돌아야 한다. 상당한 난코스라 할 것인데 그래도 이 길로 가야 남산이 남산답게 보이기 때문에 나는 항시 이 코스를 택한다.

출발지 삼릉은 능도 능이지만 만고풍상을 겪은 굽은 소나무숲이 장관이다. 강운구.주명덕.배병우 같은 사진작가들이 명작으로 담은 바로 그 현장이다. 일행은 아침 안개 속에 덮인 수수 백년 연륜의 삼릉계 솔밭을 지나며 마치 타임캡슐의 뚜껑을 여는 기분으로 남산에 올랐다.

상사암에 오르기까지 우리는 호쾌한 선을 과시한 한 쌍의 선각마애불, 농사꾼의 천진함을 지닌 마애석불좌상, 무너진 광배에 둘러싸인 깨진 석불좌상, 목은 잃었지만 몸매가 준수한 '몸짱'불상, 입술에 아직도 붉은 기가 남아 있는 '얼짱'보살상, 그리고 불심이 있어야 보인다는 미완성 마애불 등 모두 6구의 불보살상을 만났다. 이처럼 삼릉계는 시간 반 오르도록 가다가 쉴 만하면 불상이 나타나고 또 나타나는 경주 남산 입문의 최적 코스다.

상사암의 마애불은 얼굴을 두리새김으로 하고 몸은 음각선으로 처리한 제법 장대한 마애불이다. 더욱이 상사암 너머로는 서라벌 들판이 비껴 있어 그 그윽한 신비로움이 더하다. 신기한 것은 마애불 왼쪽 귓가에 작은 진달래 한 그루가 자라 4월 말 꽃이 피어나면 영락없이 뒤꽂이로 멋을 낸 모습이 되는 것이다.

상사암부터는 능선길이다. 그 능선을 따라가노라면 시계가 활짝 열려 좌우로는 들판 너머 먼 산이 아련히 다가온다. 발에 닿는 촉감이 마냥 부드러운 이 능선길은 금오산 정상까지 이어지고 여기서 계속 남으로 향하면 용장사터, 칠불암, 쌍탑으로 갈라지는 네거리가 나온다.

용장사터로 내려가는 길은 따로 없다. 그저 미끄럼바위 사이사이로 자란 소나무.참나무 줄기를 손잡이로 삼아 미끄러지며 앉아 구르며 내려가면 된다. 그러다 홀연히 나타나는 용장사터 삼층석탑을 마주하게 되면 너나없이 '동작 그만'이라는 구령이라도 받은 듯 걸음을 멈추고 망연히 바라본다. 용장사터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으로 아담한 체감률과 백옥같이 흰 빛, 그리고 천년을 두고 날이 죽지 않은 상큼한 지붕선으로 앙증맞고 야무지고 아담한 멋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더욱이 벼랑 끝에 바짝 붙어 있어 앞산은 환상적인 배경 그림이 된다. 탑의 면면을 살피고자 탑을 따라 돌아보면 먼 산이 오히려 활동사진처럼 움직인다.

용장사터 삼층석탑은 이처럼 돌출된 인공 축조물인데 조금도 환경을 파괴했다거나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안 든다. 오히려 이로 인해 평범한 자연에 인문적 가치가 살아났다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왜 그럴까? 이것이 단지 천년을 헤아리는 역사적 유물이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만약 이 자리에 동시대의 다른 삼층석탑을 옮겨다 놓아도 이와 같은 조화로움을 보여줄까? 아닐 것이다. 나는 학생들을 탑 주위에 둘러앉혀 놓고 이 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용장사터 삼층석탑은 높이 4m로 동시대 다른 탑보다 3분의 2정도 축소됐다. 또 통일신라 삼층석탑은 기단부가 상하 2단으로 구성되는 것이 하나의 원칙인데 이 탑은 하단 기단을 생략해 버렸다. 말하자면 바위산 전체를 하단 기단부로 삼은 셈이다. 이처럼 환경에 맞춘 조형적 변형이 가해져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 이어 나는 이것을 문화적으로 새겨보는 일장연설로 이어갔다.

"이처럼 원칙은 원칙으로 지키되 현장성에 맞춰 변형을 가할 수 있는 조형능력을 갖춘 문화는 결코 경직된 사회이거나 병든 사회일 수 없습니다. 탑은 하나의 종교적 건축물이면서 기념비적 조형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 세워진 천박한 기념비와 기념조각들, 그리고 속물적 과장에 넘치는 교회당, 성당, 사찰 건축을 생각할 때 이 탑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침묵의 교훈은 깊이 새겨볼 만한 일입니다."

나는 괜스레 흥분까지 해가며 이 세상에 대해 아직까지 잘못을 저지른 일 없는 어린 학생들 앞에서 내가 살아온,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성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시대에 대한 자괴감의 표출일 뿐이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어서 저 아래 용장골로 내려가 이 탑이 밑에서 올려다볼 때는 어떻게 보이나 보자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유홍준 교수<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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