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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농심으로 간 손욱 전 삼성SDI 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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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혁신 경영 전도사’ ‘한국의 잭 웰치’로 불리는 손욱 전 삼성SDI 사장이 지난 14일 농심 회장에 취임했다. 재계에선 그가 농심의 매출 정체를 극복할 ‘구원투수’로 기용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이 그에게 제안한 자리는 100년 기업의 초석을 놓을 ‘총감독’이라고 한다. <편집자> 신인섭 기자

“단순히 ‘지금의 위기를 개선해달라’는 차원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영입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 같은 회사로 농심을 키우고 싶다는 신춘호 회장의 말에 ‘그런 거라면 보람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18일 오후 서울 신대방동 농심 본사에서 만난 손욱(63·사진) 회장은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그는 지난해 말 “100년, 200년 영속하는 회사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기업문화 혁신이 필요하다”는 신 회장의 러브콜에 망설임 없이 응했다. 신 회장이 빼든 ‘손욱 카드’가 원자재 가격 상승과 내수시장 정체에 따른 실적 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국면 전환용’이 아니라, 회사의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한 ‘체질 전환용’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뜻에서 손 회장은 “마라토너가 되겠다”는 말로 취임 소감을 대신했다.

“원가 절감은 3개월 하고, 또 3개월 하고, 다시 3개월 하면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조직문화 혁신은 달라요. 마라톤 경주와 같아서 5년, 10년 동안 차근차근 해나가야 합니다. 힘의 분배가 중요해요. 삼성에서도 그랬듯이 세게 드라이브를 걸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마라토너 최고경영자(CEO)로서 그의 경영방침은 ‘3P 경영’으로 집약된다. 우수한 인재(People)를 확보하고, 좋은 상품(Product)을 만들며, 일하는 방법(Process)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그는 14일 취임식 대신 비전 선포식을 하면서 “회사의 체질과 시스템을 바꾸는 큰 그림을 그리겠다”고 천명했다.

孫 잡은 辛

손 회장은 재계에서 알아주는 테크노 CEO로 삼성에서만 40년 가까이 근무한 ‘정통 삼성맨’이다. 그가 농심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계기는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심은 2003년 일본 노노무라연구소로에 경영 컨설팅을 의뢰했다. 진단 결과 “오너의 ‘몰입 경영’ 덕분에 회사가 급성장했지만 지속 성장을 하려면 오너십보다 조직문화에 힘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신 회장은 2006년 초 GE코리아 회장을 지낸 강석진 CEO컨설팅 회장의 소개로 당시 삼성SDI 상담역으로 있던 손 회장과 만나게 됐다. 이후 신 회장은 농심이 본사 옆에 새 연구개발(R&D)센터를 지을 때 손 회장에게 자문하는 등 친분을 쌓아갔다.

손 회장은 “신 회장과 궁합이 잘 맞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지속 성장을 하려면 인재와 기술이 필수적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본 두 사람은 연구개발센터를 원래 계획보다 더 키우기로 했다. 이름도 ‘연구·경영개발센터(R&BD센터)’로 지었다. 지난해 11월 서울 신대방동 본사 옆에 완공한 R&BD센터는 ‘비즈니스 창출형’ R&D조직을 만들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가 담긴 프로젝트로 700억원을 투자했다.

“신 회장에게 ‘R&D는 비즈니스로 연결돼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더니 선뜻 수용하더군요. 전국에 있는 기업의 R&D센터를 거의 다 다녀봤지만 비즈니스와 직결된 R&D는 못 봤습니다. 연구소 이름은 신 회장이 직접 지었죠.”

신 회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기업 모델을 만들고 싶다”며 손 회장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 것. 손 회장은 “그 얘기를 듣고 처음엔 꿈인가 했다”고 말했다.

전자회사 출신으로서 식품회사 CEO를 맡는 데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았느냐고 묻자 “군인도 장군이 되면 병과를 떼는 것처럼 회사에선 임원이 되면 주특기가 사라진다”고 대답했다.

“업종과 상관없이 경영원리는 똑같습니다. 비전을 세우고 자기 역량을 근거로 그것을 달성하는 것이지요. 전자든 식품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용어와 상대방만 다를 뿐이지요.”

시장 앞에 선 孫


화제를 식품시장 얘기로 돌렸다. 연평균 성장률이 2%대에 그치면서 최근 식품업계는 성장한계에 다다랐다는 분석이다. 특히 라면 시장은 2004년 1조5000억원을 정점으로 하락세로 접어들어 현재 1조4000억원대로 뒷걸음친 상태다. 라면 시장 점유율이 70%가 넘는 농심으로선 위기가 코앞에 닥친 셈이다. 손 회장의 진단은 이렇다.

“원자재 가격 상승에 고령화, 인구 감소 등 악재가 겹쳤습니다. 식품회사들은 지금까지 이렇게 큰 위기를 경험한 적이 없어요. 그것도 한꺼번에 밀려왔어요. 이럴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구성원 모두 이 위기를 극복하면 일류기업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겠다는 뜻만 있으면 위기는 이미 위기가 아니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손 회장은 “짧은 시간이지만 농심은 장인(匠人)이 많은 회사라는 확신이 들었다”면서 “자기 영역에서 우수한 역량을 쌓아온 인재들에게 도전의식을 불어넣으면 충분히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냉동·냉장식품 등으로 상품군(群)을 확장하면 연 10%대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손 회장은 이런 포부의 실현 원동력을 잭 웰치 전 GE 회장이 얘기한 ‘바운더리리스(Boundaryless·벽 없는) 조직’에서 찾겠다고 했다.

“미국 기업들은 종업원의 능력 가운데 20%를 쓴다고 해요. 국민소득으로 역산하면 한국은 종업원 능력의 10%가량을 쓰는 셈인데, 이 수치를 높여야 합니다. 조직원 역량의 30~40%를 끌어내면 (회사가) 사는 것이고, 10%에 그치면 죽는 거지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조직구성원이 역동성을 발휘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생각의 벽’을 허물어내는 겁니다. 웰치도 기업의 적이 생각의 벽이라고 했지요. 무엇보다 ‘자생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을 만드는 데 첫 석 달을 투자할 생각입니다.”

그의 혁신 경영엔 독서 경영이 추가된다. 손 회장은 “조직의 힘은 지식 역량에서 나온다”며 “그 바탕에 독서가 있다”고 말했다. 취임한 지 일주일도 안 됐지만 그는 벌써 임직원에게 『원점에 서다』『살아남은 회사』 등 공유해야 할 책을 돌렸다.

4% 승률 전쟁

2005년 삼성인재개발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손 회장은 ‘혁신 강사’로 변신했다. 강의 때마다 그는 “혁신에 도전하는 기업 100개 가운데 20개 정도가 고비를 넘기지 못한다. 진정한 혁신에 성공해 도약하는 기업은 이 가운데 네 개뿐이다”는 말을 즐겨 했다. 농심의 혁신을 맡은 손 회장도 이 ‘4% 승률’ 전쟁에 나선 셈이다. 게다가 농심은 자타가 공인하는 일등 회사다. 적자가 난 적이 없는 회사에서 “위기”를 외치기란 공허해 보일 수도 있다. 일등 기업의 혁신은 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에 그는 접견실 한쪽에 있는 계영배(戒盈杯)를 가리켰다. 취임하던 날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직접 가져온 것이란다.

“계영배는 술잔이 가득 차면 저절로 모두 비우고, 70%만 채웠을 때 제 기능을 하는 술잔입니다. 더 채우려고 해도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신비의 잔이지요. 회사는 스스로 70%밖에 채울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나머지 30%는 고객이 채워주는 겁니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지요. ‘시장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게 일등 회사가 혁신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이상재 sangja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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