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김일성 백지 위임 사인도 물거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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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공개된 김일성의 친필 서명. 김 주석은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이 북한의 금강산 관광개발사업을 추진하도록 하고, 북한 측 파트너인 금강산국제그룹이 작성한 보고서에 서명했다.

이코노미스트 “햇볕 프로젝트(정책)를 도둑맞은 셈이지만 기업인으로서, 선대(先代)의 정신을 영원히 이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과업이 있는 나로서는 모든 언행에 품격을 잃지 않아야 한다 싶어 꾹꾹 참아왔소. 그렇지 않으면 DJ정권하고 싸워야 되는 걸?” 장치혁(75) 전 고합그룹 회장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언행을 조심하며 아직도 선뜻 나서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 회장이 침묵을 고집하더라도 이제는 대북사업의 전모가 밝혀져야 한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호부터 ‘김일성 주석’의 서명을 받아 추진됐던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의 대북사업 프로젝트 추진 과정과 그 후 DJ정권과의 관계 등을 공개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이솝 우화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다. 차가운 바람보다 따뜻한 햇볕으로 공산체제의 옷을 벗기고 개방을 유도한다는 게 목적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의 주도로 출발했다.

정치혁 회장은 오래전부터 북한과 사업을 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장 회장과 북한의 금강산국제그룹 박경윤 회장은 1993년 3월,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부터 시작하기로 합의하고 타당성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를 김일성 주석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개발을 포함한 ‘페리운항 및 철도부설 사업추진’과 ‘금강산 케이블 관광열차 운행’ 등이 합의된 고합의 프로젝트는 DJ정권이 들어서면서 느닷없이 ‘햇볕정책’으로 흡수됐다. 이 때문에 장 회장으로서는 울분이 쌓였지만 그래도 기업을 하는 입장이라 꾹꾹 누르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더구나 그 시점은 외환 대란으로 ‘IMF 총독부’가 서울에 진주한 상태에서 고합그룹이 재정적으로 위기에 몰리던 상황이었다. 시쳇말로 잘 못 보이면 빅딜이든 흑자도산이든 단칼에 갈 수도 있는 혹한의 시대여서 처분만 바라봐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대놓고 하소연도 못했을 것이다.

대북 사업 놓고 DJ와 언쟁

하지만 하소연해 봤자 소용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이미 햇볕정책이 DJ의 전유물처럼 알려졌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장 회장과 이희호 여사의 친분이 깊었다 해도 간덩이가 붓지 않고서야 황제의 손에 들어간 것을 감히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이러한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는 보고만 했는데도 고합으로서는 오히려 대북사업을 추진한 것이 화를 불러온 결과가 됐다는 소문까지 들어야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DJ께서 다 만들어놓은 것처럼 하려니 고합이 살아있으면 되겠어요? 온전할 수가 없는 거고 미운 털이 박히는 거지. 정부가 잘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면 나는 좋아요. 그런데 결과가 어디 그래요? 그리고 내 고향이 평안북도 영변인데,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서해교전으로 우리 해군이 전사하고, 그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을 때도 대북사업까지 이상하게 진행되고 해서 만나 뵈었을 때 내가 그랬어요.

‘돈 자꾸 주지 마십시오. 많은 국민이 우려하고 있지 않습니까? 북한이 서해교전 때 사용한 군함과 무기가 대통령께서 준 돈으로 구입하지 않았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북한에서) 평화로 보답할 것 같습니까?’ 이래서 언쟁이 좀 있었지요. 그때까지도 내가 구상했던 것(대북사업)하고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으니 말이지요.”

장 회장은 최근까지도 허탈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있었지만 의문이 생기는 부분은 있었다. 대외비로 되어있는 금강산 관광개발 조사보고서에 보면 김일성의 재가를 받은 것이 94년 1월 27일로 되어있는데, 그때는 YS정권 때였다. 왜 DJ정권 때까지 추진하지 않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그런 엄청난 프로젝트를 단숨에 시작할 수 있어요? 준비가 많아요. 더구나 체제가 다른 북한에서 하는 사업 아닙니까. 김일성 주석의 재가를 받은 것은 94년 1월이지만 기본 계약서 체결이 95년 1월이었고, 그때부터 남북 양측의 세부적인 허가를 받아야 하잖아요.

거기다가 실질적인 조사를 해야 할 것들이 오죽 많아요? 기술조사단 파견, 장전항 현지답사, 그리고 해상뿐 아니라 철도사업과 육상운송 사업까지 해야 되는데 나는 또 욕심이 있어가지고 여객과 화물을 같이 취급한다는 조건을 넣었단 말이죠. 그래서 극동러시아까지 연결하는 걸로 구상했거든? 하하하.

그게 아니더라도 도로, 항만, 비행장, 전력, 상하수도, 통신, 페리선 선정, 여객 숙박시설, 안전여행 보장, 입출국 수속 문제까지 하여간 준비에만 빨라야 2~3년이 걸린단 말입니다. 그런데다 김일성 주석이 급작스럽게 사망했잖아요.”

그러면서도 한발 더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침묵을 고집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선친의 유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장 회장의 선친인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 선생은 항일독립투쟁을 펼친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이며 광복 후에는 단국대학을 설립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선친은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과 주필로 활동하면서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이끌다가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망명해 그곳에서도 역시 권업회(勸業會) 기관지 권업신문에 항일 논설을 기고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때가 1912년 무렵. 그러했던 산운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륙으로 100km쯤 떨어진 ‘우수리스크’의 옛 지명이 쌍성자(雙城子)였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때부터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연구하며, 1913년에는 크라노야르 성터와 절터를 발굴하기도 하는 것이다.

장 회장이 운영하는 고려학술문화재단이 1981년에 설립한 산운학술문화재단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선친과의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고합그룹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인 1995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러시아 국립 극동대학에 지상 5층짜리 ‘한국학대학’을 건설해 기증하는 등 연해주 일대의 북방사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면서 전경련의 대북 경제협력위원장을 맡아 이른바 햇볕 프로젝트인 대북사업을 주도했던 것이다.

“아버님의 행적을 국민이 알면 내가 그동안 간도(間島)를 왔다 갔다 하고 연해주에 2억8000만 평의 농장을 조성해 북한의 식량난을 해소하려고 했던 이유를 이해하겠지만 아직은 그런 얘기 다 할 수 없어요. 내가 한때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해 조사도 하고 그랬지만 더 이상 깊이 얘기하면 한국, 중국, 일본, 거기다가 북한까지 신경 곤두세우고 외교문제로 삼아요.

연해주 문제도 역대 정권들이 다 관련이 돼 있고. 옛 소련에 빌려준 차관하고도 결부되고 북한의 식량문제를 푸는 해법도 들어있고, 내막이 깊고 예민해요. 금강산 관광개발에서부터 식량문제, 개방문제 같은 걸 전부 공개하면 DJ정권의 치적이 엉터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허허.”

DJ 개인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직접적 원인은 햇볕정책이다. 그 본격적인 시작이 바로 DJ가 평양을 방문, 김정일과 수뇌회담을 열고 6·15선언이라는 것을 공표하면서부터였다는 것은 실증적 중론이다.

국내 언론도 그랬고 거의 모든 사람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는 자체에 흥분이 돼서 지적을 못했는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해 DJ와 김정일이 만난 것은 정상회담이 아니었다. 북한의 권력조직상 서열 1위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며 김정일도 직접 그렇게 말했다.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

유엔에 가입한 국가로서 체제가 존재하고 권력조직의 서열이 있는 한 정상은 김영남이지 김정일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은 정상회담(頂上會談)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상에 대한 해석은 그렇게 정의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을 놓고 격을 높여 외교용어로 붙인다고 해도 ‘영수회담’ 또는 ‘수뇌회담’ 정도라야 무리가 없다는 얘기다.

일부에서는 북한의 최고실세라서 정상이라 했지만 가령 어떤 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이 실질적인 실력자라고 정상이라 하는가. 이유 불문하고 외교에는 원칙이 있고 상식 있는 국가에서는 웃었을 것이다.

더구나 정상회담이 아니라는 것은 평양의 환영인파들이 입증하기도 했다. 자발적이든 동원됐든 DJ가 김정일 앞에 나타났을 때 환영인파들이 손에 들고 흔든 것은 전부 붉은 조화였지 태극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정상회담을 하게 되면 마주 앉은 테이블 중앙에 양국의 국기가 놓인다. 그러나 그것도 없었다. 거리에 내걸리고 깃발을 꽂아두는 곳에도 반드시 양국의 국기가 펄럭이거나 내걸린다. 결국 그런 모습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DJ가 4억5000만 달러를 개인 돈도 아니면서 국회도 모르게 통치차원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적국에 퍼주었다는 것을 뒤늦게 국민이 알았을 때 그것을 통치차원이라고 인정했던가.

결국 모든 것이 처음부터 정상적이지 않았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인정한다 해도 DJ정권의 남북관계는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던 정재문 전 의원은 이런 지적을 남기기도 했다.

금강산 개발도 백지 위임

“DJ께서 마치 자신이 처음 내세운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 ‘햇볕정책’이 실제는 YS정권 때 나온 거지요. 그걸 DJ께서 한반도 평화를 갈망하는 많은 생각 끝에 깊은 통일철학으로 생산해낸 것처럼 내세우고 그랬는데, 식자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햇볕정책이 DJ께서 처음 쓴 용어도 아니고 DJ의 독창적인 구상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더구나 햇볕정책을 언론까지 동원해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처럼 국민을 향해 세뇌교육을 시키듯 하니까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치 통일을 반대하는 것처럼 몰아갔는데, 근본적으로 그건 진실을 덮은 겁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를 말한다면 공산권 국가를 처음 방문한 YS께서 먼저 행동에 옮겼고, 김일성 주석하고 정상회담을 하려고 했던 것도 YS가 처음 아닙니까. 어쨌든 햇볕정책은 YS정부 때 첫 통일부 장관을 했던 한완상 교수(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이미 그 용어를 썼어요.

그래서 그 일환으로 YS께서 형무소에 있던 미전향수 이인모를 북으로 돌려보내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햇볕정책까지도 DJ께서 창안한 것처럼 말한다면 난센스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겠지요.”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기업도 날리고 피눈물이 숯덩이처럼 남게 될 때까지 가슴만 태운 대북 프로젝트의 알맹이는 어떻게 꾸며져 있었는지, 장 회장은 밝힐 때가 됐을 텐데 여전히 제한적인 얘기만 했다.

“이 선생만 알고 있어요. 김일성 주석께서 금강산 개발을 포함해 북한의 관광자원을 사업화하는 문제를 전적으로 나한테 맡기겠다면서 백지 위임을 했어요. 이게 백지(A4용지의 2배 크기)에 직접 사인한 겁니다.”

타당성 조사보고서의 사인과 별도로 장 회장이 펼쳐 보인 큰 백지 한가운데에 ‘김일성’을 휘갈긴 대형 사인은 보기에도 시원했지만 역시 세계적인 독재자의 카리스마가 담겨있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금강산 관광개발에 대한 계약서는 어떤 내용으로 작성되어 있었던가.

이호 객원기자·작가[leeho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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