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 대출, 부동산·증시로 줄줄 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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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 회사원 박모(45)씨는 지난해 11월 주택담보대출로 3억원을 빌리기 위해 한 시중은행을 찾았다. 하지만 상환 능력에 따라 대출 한도를 정하는 총부채상환비율(DTI) 때문에 그가 빌릴 수 있는 돈은 1억5000만원까지였다. 그러자 창구 직원이 방법을 알려줬다. 사업자등록증을 만들어 내면 집값의 75%까지 대출이 가능한 중기 대출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박씨는 “왠지 꺼림칙해 은행원의 제안을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창구에서 상당수의 중기 대출이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2. “중기 대출은 확확 느는데 투자나 생산이 함께 늘지 않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한국은행은 얼마 전 은행권의 대출 추이와 기업의 자금 수요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이런 의문을 던졌다고 한다. 한은은 또 금융감독원과 공동으로 은행에 대한 검사를 하다가 중기 대출 자금의 흐름에 문제점을 지적했다.

#3. 이달 9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금융업계 최고경영자들의 간담회에서 박해춘 우리은행장은 “우리은행은 공적자금을 받은 은행으로서 중소기업 지원을 제일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행장은 지난해 말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을 잘 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당시 강정원 국민은행장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6일 금융감독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은행권의 중기 대출 잔액은 371조5000억원으로 1년 새 22.5%(68조2000억원)나 증가했다. 연간 증가액으로는 역대 최대치다.

서태종 금감위 감독정책과장은 “경기 회복에 따라 기업의 자금 수요가 증가한 데다 은행의 대출 경쟁으로 중기 대출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기 대출 증가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설비투자는 별로 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기업의 설비투자 추계 지표(통계청)는 지난해 5.6% 증가한 데 그쳤다. 중기 대출이 5.2% 늘었던 2005년엔 설비투자 증가율이 이보다 높은 6.3%를 기록했다. 예년에 비해 대출 증가세와 투자 증가세 사이에 불균형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기세영 기은경제연구소 차장은 “중기 대출 증가액에 비해 설비투자 증가 폭이 너무 작게 나왔다”고 말했다.

감독 당국 실무자들은 중기 대출 중 일부가 개인 주택담보대출을 중소기업의 운전자금으로 위장하는 수법 등을 통해 편법으로 집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일부 은행이 자산 확대 과정에서 편법 대출을 했을 수 있지만 서류를 갖춰 놓으면 사실상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이에 따라 금융 당국은 중기 대출의 일부가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자금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으로 보고 자금의 용도 등에 대한 사후관리를 강화하라고 은행들에 요청했다. 이광준 한은 금융안전분석국장은 “은행들이 새해엔 내실을 중시하는 경영계획을 짜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금감원의 고위 간부는 “지난해 은행권의 중기 대출 경쟁은 초반엔 국민·신한은행이 불을 붙였고 후반에 우리은행이 주도했다”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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