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블로그] 을 출신 대통령의 갑 길들이기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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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서울남부지청의 최상철 과장(52)은 묘하게도 공무원과 기업인의 경계에 서 있다. 물론 그의 신분은 공무원이다. 그러나 3년여 전 감사원이 설립한 기업불편신고센터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는 오히려 기업인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여기서 최 과장은 기업인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이를 해소해달라고 정부 부처를 설득하는 일을 했다. 지난해에는 당시의 경험을 살려, ‘기업인들이 눈물을 흘릴 때’(소금나무)라는 책을 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결과 기업불편신고센터는 최근 중소 기업인들로부터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할 최후의 보루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최 과장은 노동부로 돌아오고 나서도, 관내의 기업을 직접 돌며 일자리를 찾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기업인 같은 공무원의 전형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공무원은 갑, 기업인은 을이란 인식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실감할 때가 많다”고 말한다.

기업 사회에서 관행적으로 쓰이는 갑과 을은 계약서에서 유래한 말이다. 갑은 대가를 지불하는 쪽을, 을은 반대 급부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당사자를 지칭한다. 그러나 오늘날 갑을은 일반적으로 양 당사자간 힘의 우위 여부를 판가름하는 말로 쓰인다. 더욱이 우리 산업 현장에서 궁극의 갑, 즉 ‘갑 중의 갑’은 공무원이란 인식이 좀처럼 깨지지 않고 있다. 최근 취업 포털 사이트 인쿠르트가 직장인 2천1백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공무원을 최고의 갑으로 꼽은 응답자가 10명 가운데 3명이나 됐다. 그 다음으로 최고경영자(23%), 정치가(19%) 순이었다.

이런 전통적인 갑을 관계에 혁명적 변화를 갖고 몰고 오겠다는 것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목표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무원의 마인드 변화와 관료 사회의 서비스 조직화를 강조해왔다. 이는 정부 조직 개편과 함께 새 정부 공공 부문 혁신의 핵심 과제가 될 전망이다. 동시에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이 당선인이야말로 이 목표를 달성할 적임자라는 기대감도 고조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을의 서러움을 잘 아는 기업인 출신이다. 서울시장 재직 시절에도 9급 공무원에서부터 시장까지 모든 공무원이 참여하는 2박3일간의 기업 경영 마인드 연수 프로그램을 빠짐없이 실시해왔다.

그렇지만 문민 정부 이후 모든 정부가 비슷한 정책을 제시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섣불리 결과를 예단할 수 없다는 지적도 많다. 공무원들은 어느 나라나 예산과 인허가권을 쥐었다는 점에서 기업인보다 힘의 우위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우리의 공무원 우위 문화는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강하다.

오랫동안 지방자치단체 소속 공무원들의 기업 마인드 제고를 위해 교육 사업을 벌여온 인간개발연구원 양병무 원장은 “우리의 경우는 관료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의 영향이 강한 데다가 관 주도하에 경제 발전에 성공했다는 경험도 작용해, 공무원과 기업인의 관계를 바꾸기가 더욱 어려운 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과거 정부에서 갑을 관계의 변화를 꾀했던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갑과 을의 처지를 한 번 뒤바꿔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외환 위기 직전부터 공무원과 민간 기업인의 교환 근무를 시도해왔다. 최근까지도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민관교환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공무원과 기업인의 네트워크 형성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다른 방식은 아예 을에서 갑을 충원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개방형 임용제를 통해 민간 부문에서 고위 공직자를 충원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 역시 공직 사회가 꺼리면서 자칫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과거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양 원장은 “드물지만 공무원이 기업을 적극 지원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데 성공한 예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남 장성과 경기 파주를 대표 성공 사례로 꼽는다. 장성은 장성아카데미라는 공무원 의식 교육 프로그램을 10년 가까이 실시했고, 파주는 과감한 규제 개혁과 성장의 비전을 확산시킨 것이 주효했다. 두 도시 모두 기업인 출신 지자체 단체장이 발 벗고 나섰다는 공통점도 있다.

결국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해법이 아니라 목표를 확고히 하고 지속적으로 교육시키는 것만이 해법이란 지적이다. 공무원과 기업인 간에 수십년간 계속돼온 상석(上席)의 관행을 뒤집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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