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아이디어에 교수 16명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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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오프 겸용 포스트잇을 개발한 한국과학기술원 문화기술대학원생 신승의ㆍ허민회ㆍ이상원씨(왼쪽부터). 배경으로 보이는 것은 교내 아이디어 공모전에 냈던 프레젠테이션 자료다. [신동연 기자]

#1. 2012년 4월, 허민회씨는 특수 메모지에 동창회 날짜를 적어 컴퓨터 화면에 붙인다. 그러자 메모 내용이 컴퓨터 화면 안으로 빨려들어가 모양 그대로 그림판 파일에 저장된다. 특수 메모지는 이른바 ‘온ㆍ오프 겸용 포스트잇’.

#2. 2017년 11월, 미국 뉴욕에 도착한 김현정씨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손수건을 펼치자 바로 A3용지 크기의 단말기가 된다. 김씨는 공항에서 받은 시내 지도를 ‘손수건 단말기’에 다운로드한다. 김씨는 단말기에 뜬 입체지도를 보며 목적지를 찾아간다.

과학소설에 나오는 상상이 아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젊은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내 상용화 단계에 들어간 기술이다.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를 거쳐, 상상력이 성장동력이 되는 ‘창의 사회’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첫째 사례는 교내 ‘5년 후 미래단말팀’인 이상원ㆍ신승의ㆍ허민회 학생이, 둘째 사례는 ‘10년 후 미래단말팀’인 김현정ㆍ홍화정ㆍ트랑(베트남) 학생이 낸 아이디어가 연구의 시발점이 됐다.

서남표 총장은 지난해 4월 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었다. 주제는 ‘미래단말과 미래TV에 관한 아이디어’. 서 총장은 KAIST가 세계 일류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천국’이라는 애칭을 얻고 있는 미국 MIT 미디어랩처럼 학생들이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모두 98건의 아이디어가 접수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공계 천재들이 넘쳐나는 학교에서 문화·디자인 전공 학생들에게서 아이디어가 나온 점이다. 금상 2팀 중 1팀은 산업디자인과 학생, 다른 한 팀은 문화과학대학원 학생들이었다. 미래TV 분야에서 금상을 탄 이은정 학생은 아직 전공도 정하지 않은 1학년 새내기 여학생이었다.

교수들은 단말기 아이디어가 충분히 상용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전자·기계·물리ㆍ항공·디자인 전공 교수 16명으로 연구팀을 구성, 개발에 착수했다.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관련 기술, 예를 들어 꺾고 구겨도 괜찮은 초박막 디스플레이 등을 고안해냈다. 아이디어를 낸 학생도 일부 참여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이디어’를 보호하기 위해 특허를 출원했다. ‘손수건 단말’은 지난해 9월 특허를 받았고, ‘온·오프 포스트잇’은 특허 절차를 밟고 있다.

‘손수건 단말팀’의 김현정 학생은 3개월 동안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이 어떤 것을 불편해하는지 시장조사를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길을 가다 음악회 포스터에 단말기를 갖다 대고 문지르면 자동 저장되는, 그런 단말을 원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온·오프 포스트잇팀’의 신승의 학생은 MIT 미디어랩을 뛰어넘는 아이디어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역발상을 했어요.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적으로 쉽게 쓸 수 있는 전자 포스트잇은 없을까. 그러다가 아이디어가 나왔지요.”

산업디자인과 이권표 교수는 “미래단말 개발 사례는 국내 교육·연구기관도 여러 전공자가 힘을 합쳐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MIT 미디어랩이나 스탠퍼드 D-스쿨처럼 ‘창의의 용광로’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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