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며생각하며>朝鮮末 청백리 李建昌 증손 李亨周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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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어떤 좋은 저자(著者)또는 어떤 좋은 저작(著作)을 대하게 되는 것은 그 방면의 비전문적 독자에게는 대체로 우연이다.나는그럴 때마다 나의 운수 좋음을 혼자서 탄복한다.서여 민영규(西餘 閔泳珪)노교수의 문집『강화학(江華學)최후의 광경』의 첫글「이건창(李建昌)의 詩세계」를 읽다가 나는 몇차례나 창문 쪽으로갔다.눈이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창 밖에서는 어떤 쓸쓸하면서도 반가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바깥은 날씨는 흐려 있었지만 눈은 없었다.
강설(降雪)의 느낌을 들게한 것은 西餘 노인의 글속에 있던 하염없이 걸어간 그 어른 자신의 정신적 발자국이었다.
나의 이 행복하고 쓸쓸한 독서는 며칠동안「예루살렘 입성기(入城記)」와「사천강단(四川講壇)」등으로 이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한편 나는 명미당(명美堂)이건창(1852~1898)의 시를비록 손에 잡히는대로였지만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즈음이었다.신문사 동료 한 사람이 좋은 취재대상이 있다며 나에게 이건창선생의 증손자 이형주(李亨周)씨의 존재와 전화번호를 가르쳐준 것은.
명미당의 작시(作詩)가 서여의 우리말 옮김과 짝한 것으로『강화학 최후의 광경』에 실린 매화시(梅花詩)의 절묘가 있다.
버들이 가늘어서 실이랍디까/무엇으로 오는 설 꿰매어 입고/매화가 희어서 쌀이랍디까/무엇으로 빈 밥솥 안친다지요.
(盡日淸齋坐小龕 時聞廚婢語니남 絲絲楊柳裁衣好 粒粒梅花作飯甘)그러나 내가 이건창을,오늘날 한글로 시를 쓰는 모든 시인들을 포함하는 고려와 조선의 시인 산맥 가운데 단연코 백두산 같은 분으로 꼽는 까닭은 이런 빼어난 절구(絶句)나 율시(律詩)에 있지 않다.자유분방한 고시(古詩)나 악부(樂府) 의 형태와 분위기를 취하면서 절망과 허무의 눈보라를 망해가는 조국과 사상의세기말적 광야에 가득하게 뿌리는「고령가(高靈歌)」「벌오룡(伐吾龍)」등에 있다.
나는 이 시들은 비록 한문으로 씌어졌지만 가장 성공적인 한국의 현대시라고 여기고 있다.이 두편의 시는 유교적 관료체계와 이 체계 속에 선택된 선비가 누리는 영화와 閑寂,이 두가지가 파괴되고 있는 현실에 한편으로는 절망하고 한편으로 는 환희하는위대한 의미를 가득히 지니고 있다.
이형주(52)씨는 구리시 왕숙천변의 18가구가 들어있는 재건대 막사 단칸방에서 부인.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직업은 17년 넘게 이른바 넝마주이 즉 양아치였다.최근에는 공사장 콘크리트 잡부 일을 다닌다.최근에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다음의 겨울철이라 그나마 일이 없다.그는 자기의 증조부를 시인으로보다는 15세에 대과(大科)에 장원급제하고 23세에 고종의 특명으로 충청도 암행어사가 되어 당시의 부패한 세도가 출신 관리들을 혼쭐낸 청백리쪽으로 더 이해하고 싶어한 다.임금이 황해감사자리를아무리 하라고 해도 사양하고 그 바람에 대신 고군산도로 귀양가야했던,이해할수 없이 청렴했던 선비쪽으로 더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제가 태어났을 때는 강화 제 조상님들이 살던 집은 이미팔려 남의 집이 되어 있었습니다.논.밭은 한평도 없었습니다.아버지는 형제분이었는데 큰아버지와 제 부모는 일찍 돌아가시고 큰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큰댁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저한테는 형님과 누님이 있었으나 두 사람 다 순하기만 하고 몸이 약해서 어렸을 때부터 생활은 제가 맡아서 했습니다.조개를잡아 팔고,가까운 산에서는 주인이 못하게 하니까 먼 산에 가서나무를 해서 팔았지요.강화섬화도면사기리에서 이렇 게 해서 18세까지 살았습니다.국민학교만은 그래도 졸업장을 받았습니다.기성회비를 못내니까 다니다 말다 했습니다만 마니산국민학교 1회 졸업생이지요.』 이 사람은 몸집도 작고 뼈대도 가늘다.다만 눈빛만은 맑고도 뚜렷하다.이 말을 끝내고 그는 소리내어 웃었다.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 나를 자신의 열등감과 모순을 비추려고 일부러 찾아온 거울쯤으로 의식하는 듯했다.누군가에게 말을 해야겠다,한편 아무한테도 말하고싶지 않다.그는 이런 갈등에 시달리고있는 듯 했다.그의 웃음 소리는 이런 마음속의 마찰이 빚는 허무의 소리 같이 들렸다.이 허무는 명미당한테서 핏줄을 타고 내려온 이 가문의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정서일지도 모른다.
『배를 타고 나가 모시조개를 잡았습니다.그것을 그 당시 강화와 인천 사이를 다니던 여객선「금회호」에 꼬리표를 달아 보내면그 값을 선원 편에 보내주었습니다.풍랑이 일거나 배가 고장이 나면 섬 안 바닷가와 떨어진 곳으로 팔러 갔습니 다.하루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따라간 곳이 마침 증조부 산소 있는 양도면이었습니다.이집 저집 기웃거리다가 어떤 집에서 50대 남자를 만났는데 어디서 왔느냐고 묻습디다.사기리에서 왔다고 했지요.그분이참봉님댁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습디다.아무말도 안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으니까,아 양반님 댁 있잖아,하고 재차 묻습디다.
그래도 머뭇거리고만 있으니까 그 사람이 알아차리고 얘 이리와,너 그댁 아이구나 하며 쌀을 몇 됫박 자루에 담아서 가져가 먹으라고 주었습니다.양식 이 떨어져 며칠을 굶다가 동네사람에게 쌀을 꾸러 가면 대체 언제 갚겠다고 꿔달라느냐며 핀잔이나 받곤하던 때였습니다.』 ***쌀꾸다 핀잔들어 이형주씨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벼슬한 집안 아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나 도리어 조상이 벼슬을 했기 때문에 그 일로 남에게 욕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어떻게 자기가 잘되어 돌아가신 조상님들을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도 품고 있었다.
그의 조상은 그에게 극심한 가난과 주체하기 힘든 가문의 명예를남겨 놓았던 것이다.
이건창의 조부,그러니까 이형주씨의 5대조 이시원(李是遠.1790~1866)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사람으로 1866년 프랑스 군이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丙寅洋擾)때 아우 지원(止遠)과 함께 스스로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
『61년 처음 서울 와서는 유한양행이 경영하던 한국직업학원의사환으로 들어갔습니다.저를 서울로 데려와준 분은 당시 유한양행의 사장이었습니다.그분이 유한양행을 그만두고 인쇄소를 차리게 되자 저도 그 인쇄소로 일자리를 옮겼습니다.초산 으로 아연판이나 동판을 부식하는 제판부에서 일했습니다.공기가 매우 탁한데였습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폐결핵에 걸렸습니다.65년에 군에 입대했는데 거기서 제가 결핵 환자인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의병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제대후 그런 몸으로 다시 그 인쇄소를 다녔습니다.병에 시달리다보니 힘든 일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었습니다.그러나 저는 백모님,결혼에 실패한 누님,노동력 없는형님,이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그러다가 그만 불면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견뎌낼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자살을 결심하고 집을 나와 약을 먹었습니다.사 람들에게 발견되어 제가 깨어났을 때는 병원이었어요.거기서 재건대원을 알게 되어 넝마주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약을 먹기 전에 강화도에서가지고온 집안의 장서들을 국사편찬위원회를 찾아가 기증했다.이 일이 인연이 되어 몇분 저명한 사학자.국문학자를 알게 되었다.
그는 넝마주이 생활을 하던 75년에 지금 부인과 결혼을 했다.신랑은 서른두살,신부는 스무살이었다.넝마주이 동료이던 어느 신학생이 중매를 섰다.결혼 말이 나왔을 때 쌍문동 다리 밑에서움막을 치고 동료들과 살고 있던 그는 말도 안된 다고 처음에는펄쩍 뛰었다고 한다.그러다가 어머니(백모)살아 계신동안 며느리를 한번 보여드렸으면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색시감을 보았더니 너무나 아름답더란다.그는 나와의 대담 도중에 자기는 너무나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왔노라고 한탄한다 .한가지는 그후 백모가 별세할 때까지 함께 모시고 살지 못하고만 일이다.
***12년 연하의 新婦 넝마주이는 청소원들과 가까이서 일한다.그에게는 청소원 자리가 큰 벼슬처럼 보이더라는 것이다.이 자리를 하나 얻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거의 성사가 될뻔하다가 거기에도 돈과 빽이 필요한데 그것이 모자라 실패했던 일을 그는잊지 못한다 .그는 이 일도 몹시 부끄러워 한다.자기 증조부는황해감사도 마다했는데 자기는 청소부 자리를 놓고 다퉜다는 점이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쓰레기 투하장을 하나 맡아 거기서 넝마를 줍는행운을 잡는다.70년대 말이었다.한달에 약 70만원이라는, 그에게는 큰 수입이 꼬박 꼬박 들어왔다.얼마 안있으면 판잣집이지만 집도 한채 장만할 계획마저 섰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그는 그의 인생 가운데 최대의 불행한 일이 그때일어났다.어느 날 그는 어떤 신문에서 증조부 이건창에 관한 기사가 난 것을 읽게 되었다.그는「조상님 모시기」에 그 몇푼 안되는 전재산을 다 털어넣고 모자라서 행상을 하는 장인과 장모까지도 빚더미에 올려 앉히고 만다.
「사기 영재 양선생기념사업회(砂磯 寧齋 兩先生紀念事業會)」를창립했다.사기와 영재는 각각 이시원과 이건창의 아호(雅號)다.
그는 80년대 10년을 이 기념사업회 일에만 매달렸다.집안 살림은 다시 엉망이 되었다.아들은 넝마주이네 자식 이라는 학교 친구들의 놀림을 참아내지 못해 가출해 버렸다.이 기념사업회가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기념사업회 추진에 무력하거나 냉담했던 학계 인사들을 원망한다.그러면서 집안에 남아 있던 가승(家乘)따위 헌책을 들고그 사람들을 찾아가 돈을 구걸하다시피한 행동을 한 자기가 부끄러워 못살겠다고도 한다.
내게는 이건창과 이형주,이 두사람 사이의 생물적 유전과 사회적 계승이 너무 가슴 답답한 수수께끼가 되어버렸다.내가 이형주씨한테 한 말은 李亨周라는 이름의 획수가「도계획수길흉비결(道溪劃數吉凶秘訣)」에 의하면 22획으로 최흉수(最凶數 )니 亨자를衡자로 바꿀 것과,앞으로는 돌아가신 조상 모실 생각은 완전히 걷어치우고 지금 마음잡고 공장에 다니는 아들에게 첨단기술 하나를 배우도록 뒤를 밀어주라는 것이었다.이형주씨는 지금 출판을 목표로 자기가 걸어온 인생유전(人生流 轉)을 집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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