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DNA로 ‘바람끼’까지 알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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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유전자의 비밀지도
최현석 지음, 지성사, 344쪽, 1만7000원
 
미국 부통령을 지낸 험프리는 1967년 피가 섞인 소변을 보았다. 방광경 조직검사를 받았으나 암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76년 진행성 방광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2년 후 사망했다. 90년대 들어 유전자를 수억 배로 증폭할 수 있는 중합효소 연쇄반응법이 개발되자 67년 채취된 소변을 검사해보았다. 그 결과 암 발생을 억제하는 p53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유전자 검사만 할 수 있었다면 그가 방광암으로 진단받기 9년 전에 미리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은 환자의 가래나 대소변에서 암과 관련된 일부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찾아내는 방법도 개발됐다. 폐암이나 대장암이 발생하기 전이나 발생 직후에 예측이나 진단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오늘날 유전자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남미의 콜롬비아 주민들을 상대로 두 종류의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를 보자. 아버지에게서 아들로만 유전되는 Y 염색체와 어머니 것만 자식에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가 대상이다. 현대 콜롬비아 남성의 94%는 스페인 남성들과 같은 Y 염색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물학적으로 직계 후손이라는 뜻이다. 반면 콜럼비아 남녀의 미토콘드리아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아메리카 원주민 DNA가 확인됐다. 스페인 남성 정복자들이 원주민 남성을 살해하고 원주민 여성을 아내로 삼았던 역사가 반영돼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유전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지식이 어느 단계에 와있는지를 110여 개의 항목을 통해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범위는 인간의 행동이나 질환에 유전이 얼마만큼 기여하는가를 비롯해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까지 이른다. 한 예로 유전자를 통해 인류의 외도성향을 추정한 부분을 보자. 암컷이 여러 수컷과 짝짓기를 하는 영장류 사회에서는 수컷들의 정자에서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빠르게 진화한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조사 결과 인간의 해당 유전자는 일부일처제의 긴팔원숭이와 난교하는 침팬지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능에서 유전이 차지하는 비중도 눈길을 끈다. 90년대의 연구들은 IQ차이의 50% 정도는 유전에 의해 결정되고 가정 내 환경이 미치는 영향은 20%가 채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나머지 30%는 어머니의 자궁, 학교, 친구관계와 같은 외부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이란성 쌍둥이는 유전적으로는 형제와 동일하지만 같은 시간 같은 자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형제에 비해 IQ 상관관계가 높다고 한다.

포괄적인 의학지식이 돋보이는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항목의 도입부마다 해당 주제의 이해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설명해주는 친절함에 있다. 소화궤양을 다룬 설명이 그 예다.

“위에서 분비되는 염산과 단백질 분해효소인 펩신은 음식과 함께 들어온 세균을 파괴하고 음식의 단백질 성분을 분해한다. 위와 십이지장의 보호점막에 문제가 생겨 염산과 펩신에 의해 자신까지 소화돼버리는 것이 소화궤양이다. 우리나라 인구의 10% 정도가 이 병을 앓고 있다.”
 
저자는 서울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성균관대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현내과 과장으로 있다. 『아름다운 우리 몸 사전』으로 지난해 동아의학상을 수상했다. 

조현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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