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탄생' 100돌…세계는 '대중 스타' 달리에 반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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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작품의 상징처럼 돼버린 늘어진 시계가 등장하는 31년작 '기억의 끈덕짐'. 현실의 구속처럼 단단하고 기계적인 사물을 부드럽고 물렁하게 만드는 모순은 초현실주의의 환상 효과를 봄과 동시에 성적인 이미지를 남긴다.

▶ 달리는 영화.패션.디자인.상업광고.무대미술 등 순수미술의 벽을 뛰어넘어 대중문화의 모든 영역을 두루 누볐다. 달리가 영국의 백만장자 에드워드 제임스를 위해 1937년 디자인한 '바닷가재 전화기'.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사람들에게"어디를 구경갈까" 물었을 때 한결같이 꼽는 미술관은 두군데였다. 고야.벨라스케스.엘 그레코의 걸작을 포함해 8000점 이상의 고전 회화를 자랑하는 프라도 미술관과 20세기 현대미술을 모아놓은 국립소피아 왕비예술센터다.

프라도의 명성이야 더 말할 것이 없지만 국립소피아도 만만치 않은 것이 20세기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게르니카'가 2층 복판에 버티고 있어 1년 내내 관람객이 바글거리기 때문이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서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은 한 도시의 참극을 담은 이 대작은 전쟁과 학살에 대한 예술적 분노로 유명하다.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게르니카'보다 더 사람이 복작거리는 곳이 생겼다. 살바도르 달리(1904~89)의 작품 앞이다. 초현실주의의 대가로 이름난 달리 탄생 100년을 맞은 스페인은 올해를 '달리의 해'로 정했고, 달리에 대한 대중적 인기몰이 행사를 여럿 준비했다. '밀레의 건축적 삼종기도''창가의 인물' '뒤에서 본 의자에 앉은 여자''작은 쇳조각들' 등 달리의 대표작을 30여점 이상 소장하고 있는 국립소피아 벽면에는 '달리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위해 작품이 다른 미술관에 대여 중'이라는 안내가 서너 군데나 붙어 있었다.

지난 10일 오후 달리의 38년 작 '끝없는 수수께끼'앞에서는 아예 바닥에 둘러앉은 한무리의 학생들에게 달리 그림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다중 이미지 기법'을 설명하는 미술사 교수의 강의가 펼쳐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사람 얼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배와 누워 있는 인물.개 한마리.정물 등으로 구분되는 묘기를 해부하던 그는 달리 그림이 왜 대중적 인기를 얻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지금 여러분이 느끼듯 달리의 그림은 보는 이의 눈에 직접 호소하는 이미지로 매력적이죠. 억압돼 있던 잠재의식을 자극해 한껏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게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게다가 주로 다루는 소재가 섹스.죽음.운명 등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쉽고 재미있어요. 달리는 자신을 현대미술의 신화이자 스타로 제조한 거죠."

2월부터 5월까지 바르셀로나 '카이샤 포럼'에서 열리는 기념전 제목은 '달리와 대중문화'다. 미치광이처럼 세상의 이성적인 규칙을 경멸하면서 "광인과 나의 차이는, 나는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던 그는 20세기 전반에 이미 수십년 앞서 대중문화의 본질을 본능으로 꿰찬 영리한 어릿광대였다는 것이 이 전시의 요지다. 달리에게 초현실주의는 대중의 눈을 구속하는 현세의 온갖 쇠사슬을 부수려고 특별 제작한 '혼란의 도가니'였고, 그 형식은 가장 대중적 이미지로 사람들 눈을 사로잡았다. 달리의 그림이 광고 이미지와 쉽게 뒤섞이고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그의 환상과 대중성을 보여준다.

달리가 고향인 피게라스에 직접 세운 '극장식 미술관'과 미국 플로리다 주 세인트피터즈버그에 있는 '달리 미술관'을 비롯해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기념전을 소개하는 홈페이지(www.dali2004.info)에 들어가면 화면을 꼼지락거리며 기어다니는 개미가 인사한다. 달리의 37년 작인 '개미'가 환생해 달리대신 정신적 자유를 갈망했던 그와 그의 그림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드리드=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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