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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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읍사(井邑詞) ○20 『뱃사람들이 노 저을 때 부르는 소리는 원래 「어기야 디야」지요.「에야 디야」라고도 하고요.』 『맞아요.「에다」라는 말은 칼 같은 것으로 금을 그어 도려내는 일을 가리키지요.「어기다」도 마찬가지 뜻이에요.
그런데 「디야」는 뭘 말하는 걸까?「에야 디야」「어기야 디야」의 「디야」….』 김사장에게 대답하면서 길례는 스스로에게 캐묻듯 했다.
『…「디야」? 그건 「지야」의 옛말 아닐까? 왜 지금도 북쪽사람들은 ㅈ소리를 ㄷ소리로들 발음하잖아요?「전기」를 「뎐기」,「정거장」은 「뎡거당」….』 평양이 고향이라는 서여사가 매듭을푼다. 『에고 지고.어기고 지고.그럼 에고 어기는 동작을 계속하고 싶다…그런 뜻인가요?』 『이 경우의 「지야」는 「지운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에고 지우고,어기고 지우고… 노 젓는 것을 가만히 보면,노가 바닷물이나 강물을 일단 도려내듯이 에고나서 잠시 틈을 뒀다 또 에면 배가 앞으로 나가게되지 않아요?』 김사장에게 길례가 다시 대답한다.
『어기고 지우고…그럴듯해요.』 서여사.
『노래의 속뜻이 드디어 들여다 보이기 시작하는 데요.』 겉으로는 밤하늘의 달이 높이 돋아 먼데까지 비춰 주기를 바라는 소박한 노래처럼 보이지만 실은 남근(男根)이 힘차게 솟아 여음(女陰)을 에어 달라는 음사,그러나 속의 속 노래는 전혀 엉뚱하다. 우리 군사가 궐기하여 적의 무리를 칼로 도려냄으로써 백성에게 고루 빛을 비춰 달라는 처절한 노래.어느 때의 노랠까.
백제 멸망 전후의 사정에 눈을 돌려야 할 것 같다고 서여사는제의한다.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항복하여 당나라로 잡혀간 것은 660년이고,왜로 가있던 그의 왕자 부여풍(扶餘豊)이 새 백제왕이되어 돌아와 항쟁하는 것은 662년.결국 내분이 일어나 백제가완전히 멸망하고 마는 것은 663년9월7일이었 지요.』 왜는 당시 백제 직할국이었다.
그 왜가 군력을 모아 새 국왕을 백제로 보내기까지의 이태동안모국의 유민들은 왜를 향하는 바다로 나날이 뜨거운 기도를 띄웠을 것이다.
-달하 높이곰 돋아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그 기도가 바로 이 노래 구절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닐까.
『그때의 왜 실권자인 중대형(中大兄)은 백제 무왕(武王)의 왕자로 봐지는 교기(翹岐)였지요.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중대형도 정변을 일으켜 왜에서 집권한 사람인데,달에 빗대어 궐기를선언한 그의 노래가 일본 옛 노래 책인 「만엽집 (萬葉集)」에남아있어요.
그 무렵,백제에서나 왜에서나 달을 궐기의 표현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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