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데뷔 무대에 선 여성 지휘자 성시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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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애호가들이 교향악단 연주회를 선택하는 기준은 나라별로 다르다. 영국은 연주곡목, 일본은 오케스트라의 지명도와 지휘자의 매력, 한국은 레퍼토리와 연주자의 명성을 보고 음악회를 찾는다.

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서울시향의 올해 첫 정기 연주회는 레퍼토리도 매력적이었지만 참신하면서도 젊은 지휘자와 협연자가 처음부터 주목을 끌었다. 한국 출신의 여성 지휘자가 지휘봉을 잡는다고 해서 호기심 때문에 음악회를 찾은 관객이 있는가 하면, 지난해 2월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독주회에 이어 11개월만에 내한 공연을 하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피아니스트 세르히오 티엠포를 다시 보려고 온 사람도 많았다.

이날 연주회의 주인공은 국내 데뷔 무대에 선 신예 지휘자 성시연(31)씨였다. 여성 지휘자는 어떤 동작으로 지휘를 할까, 오케스트라는 과연 어떤 소리를 낼까 궁금해하면서 음악회를 찾은 관객들은 시간이 점점 흘러갈수록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은 모습만 빼면 여성 지휘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를 기른 다음 묶고 다니는 남성들도 적지 않으니 거의 낯설지 않았다.

객석에서 보는 뒷모습은 그렇다고 해두자. 섬세하면서도 박력이 넘치는 신호 언어 구사로 빚어내는 관현악의 사운드는 눈을 감고 들으면 오히려 여느 남성 지휘자의 연주보다 더 힘차게 느껴졌다. 제1바이올린 파트를 향해 시선을 돌릴 때 객석으로 노출되는 옆모습을 볼 때마다 그의 눈빛에서 카리스마와 자신감이 배어났다.

서곡으로 들려준 쿠르탁의 ‘스텔레(석판)’에서는 물결치는 음향 세계로 표현해낸 깊은 사색의 경지를 차분하게 잘 표현했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젊은 혈기와 튀는 개성으로 무장한 세르히오 티엠포의 자유분방한 해석을 잘 보듬어 안으면서 긴밀한 호흡을 연출해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에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표현력과 일사불란한 영도력으로 거장의 풍모마저 느끼게 했다. 이제 갓 데뷔한 신예 지휘자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후반부에 등장해 단원 전체를 일으켜 세워 박수를 받게 하는 등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지만 일단 지휘대 위에 올라서서는 자신의 요구 사항을 거침없이 주문해 웅대한 음향의 건축물을 무대 위에 우뚝 세웠다. 찰나적인 연주 효과에 집착하지 않고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면서 진지하게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돋보였다. 열정적이면서도 군더더기나 과장은 보태지 않은 지휘 동작으로 교향악단은 물론 관객까지 휘어잡았다.

성시연은 남성 지휘자와 겨뤄도 전혀 손색이 없고 오히려 능가할 정도의 기본기와 위기 관리 능력을 소유한 실력파 지휘자였다.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것은 여성 지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음악계의 고질적 문제인 지휘자 기근 현상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음악가이기 때문이다.

티엠포와 성시연은 여러 차례 커튼콜을 받았다. 티엠포는 피아졸라의 ‘천사의 죽음’을, 성시연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 2악장을 각각 앙코르로 들려줬다. 새해 벽두에 신예 음악가들의 열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무대였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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