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평>과거란 언제나 새로운 시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정용욱(鄭容郁)씨는91년 어느날 일대 용단을 내린다.집을 팔아 미국(美國)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야겠다는 결심이었다.
현대사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를 구해보기 위해선 국립문서보관소를찾아야했고 몇달 몇년이 걸릴지 모를 체재비를 위해 그의 유일한재산인 집을 파는 수밖에 없다는 결정이었다.이래서 그는 1년 6개월동안 워싱턴 문서보관소엘 직원처럼 출퇴근 하면서 정말 피와 땀으로 얼룩진 자료 뒤지기 작업에 몰두한다.그는 귀국 즉시모은 자료들을『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사료집』이라는 12권의 전집으로 자비(自費) 출간한다.
이 젊은 사학도가 어째서 자신의 연구를 위해 전재산인 집 한채를 바쳐야했고 다른 연구자들이 자신의 피땀어린 자료를 공람할수 있게 했는가.광복 50주년을 맞은 지금 바로 이 젊은 사학도의 열정과 각고의 헌신에 고개 숙이면서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국사교과서 편찬과정에서 현대사 파동이 일어났을 때 현대사 연구의 부진을 개탄만 했지 역사연구의 기본 원료인 사료(史料)의부재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불행히도 우리의 현대사연구를 뒷받침할 결정적 중요 사료를 우리는 그렇게 많이 보관하고 있질 못하다.그나마 있던 자료마저 전쟁중에 산일(散佚)되었지만이를 다시 수집하고 보관하려는 노력을 지금껏 어느 정권도 보인적이 없었다.이러니 한 젊은 사학자가 사재를 털어 연구를 해야하는 나라없는 문화풍토가 돼버 린 것이다.
中央日報社가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해외의 현대사 자료를발굴 수집하겠다는 방침을 지난해 여름 발표했을 때 이를 본 국회도서관의 한 자료전문가가 필자를 찾았다.국회도서관도 같은 의지와 필요성을 동시에 느끼고 있으나 예산이 없어 착수를 못하니공동으로 자료개발에 나서는게 어떠냐는 간곡한 제의였다.이 무렵일본(日本)의 국회도서관이 14년간 도서관 전문요원을 워싱턴 현지에 파견해서 美점령군사령부의 이른바 SCAP프로젝트 자료 전부를 마이크로 필름化했다는 뉴 스가 신문에 보도되고 있을 때였다. 광복 50주년을 맞으면서 정부내 기념사업회까지 발족되었지만 현대사 자료를 수집하겠다는 소리가 어디서도 나오지 않고 있다.현대사 연구의 주력기관이어야 할 국사편찬위원회의 94년 현대사 자료수집비는 통틀어 4천여만원.그중 해외 자료구 입비는1천만원 정도가 고작이었다.일본 국회도서관이 미국내 자료구입을위해 14년간 2천억원을 들인 것을 볼때 이 얼마나 문화의 후진성을 단적으로 보이는 초라한 모습인가.
한국관계 자료가 미국에만 있는게 아니다.일본을 비롯해서 구소련의 국방부와 민정청 자료보관소등엔 한국 분단사와 6.25전쟁연구에 결정적 역할을 할 문서가 수없이 쌓여있지만 정부의 어느누구도 관심을 갖고 이를 챙기는 사람이 없다.
몇몇 연구자들만이 가슴 태우며 이를 안타까워 할 뿐이다.
옛총독부 건물의 꼭지부분만 답삭 들어내는 식의 감정적 이벤트사업으로 광복 50주년을 치르려해선 안된다.말짱한 건물을 뜯어내고 새 건물을 짓는데 수조,수천억원 생돈을 쓰려들지 말라.그돈이 있다면 우리의 현대사,우리의 분단사,우리의 전쟁사를 밝혀줄 사료를 세계 곳곳 찾아다니며 수소문하고 수집하는 일에 늦었지만 정부가 지금 당장 착수하는게 더 급한 일이다.몇몇 연구자,어느 한 신문사나 기업이 전부를 담당하기엔 너무나 벅차고 힘든 일이며 사업의 성격상 반드시 정 부가 해야할 기본적 국가사업이다. 역사의 중대한 기록이나 문서가 몇몇 연구자.특정단체에의해 수집되고 소장되면 공유(共有)돼야할 역사기록이 사유화(私有化)되거나 독점될 소지가 크다.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고 아무런 학문적 검증도 거치지않은 자료가 툭하면 최초 발굴, 독점 공개라는 이름으로 무성의하게 보도 경쟁을 벌일 수 있다.
***國史 바로알때 세계화 워싱턴 국립 문서보관소에 들어서면정면 벽에 길게 늘어뜨린 녹색 장막이 눈에 띈다.그 위에 이렇게 적고있다.「과거란 새로운 시작」(What is past is prologue).과거란 지나간 낡은 유물이 아니라 현■ 우리 삶의 모 범이고 거울이며 시작이라는 뜻이다.
세계화.국제화의 시작은 제나라 제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보기 시작할 때 비롯된다.우리의 국회도서관이,우리의 국사편찬위원회가 세계에 흩어진 우리의 현대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예산을세우고 전문가를 파견할 때 비로소 우리의 현대사 인식과 세계화인식도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本社 현대사연구소장겸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