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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디자이너가 전시실 큐레이터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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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10면

세계 최대의 디자인 박물관 ‘노이에 잠룽’의 자동차 전시실(왼쪽). BMW 수석디자이너가 만든 비디오아트(오른쪽 위)와 대리석 조형물(오른쪽 아래). 노이에 잠룽 제공

유럽 최대의 현대미술관인 독일 뮌헨의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디자인 박물관 ‘노이에 잠룽’으로 유명하다. 노이에 잠룽의 한쪽 벽면을 꽉 채운 하얀색의 평면 대리석 조형물은 한가운데에 마치 상어지느러미처럼 매끄럽고 날렵한 선이 도드라져 있다. 기자가 동경하던 스포츠카 Z4의 옆 라인을 꼭 닮았다. 미술관에 전시된 조각품을 시판되는 자동차와 비교하면 예술에 대한 경외심이 부족한 것으로 보일까.

예술의 경계 허무는 박물관, 獨 노이에 잠룽

“저… 이건 정말 Z4랑 비슷하네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전시실을 안내하던 휠셔 큐레이터가 “맞아요, 맞아요” 즐거워하며 맞장구친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기자를 얼른 대리석 조형물의 옆면으로 데리고 갔다. 차 바퀴, 핸들…. 다양한 자동차 부품이 대리석 조형물과 벽면 사이를 꽉 메우고 있다.

“다 Z4 부품들이에요. 이 조형물은 Z4를 디자인한 크리스토퍼 뱅글이 만든 것이거든요.”

휠셔 큐레이터가 전시실의 또 다른 벽면에 설치된 비디오아트 작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흰 벽면에 마치 몬드리안의 작품처럼 보기 좋게 분할된 6개의 스크린이 파란색·붉은색 등으로 아름답게 바뀐다. 연필로 빠르게 디자인화를 그리는 손이 한쪽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저건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있는 뱅글의 손이에요. 화면을 찍고 편집하고, 음악까지 다 그가 맡은 작품이죠.”

휠셔 큐레이터는 자동차 디자인 전시실 전체를 BMW의 수석디자이너인 뱅글이 기획했다고 덧붙였다. 널찍한 흰 공간에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을 예술적으로 배치한 것이 큐레이터가 아니라 현직 자동차 디자이너라니? 세계 최대의 디자인 박물관이 대표적인 상설 전시실을 통째로, 미술 전문가가 아닌 첨단 제품 디자이너에게 내준 것이다.

“자동차는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이지만 인간의 손으로 창조한 조형물이기도 합니다. 대량생산되고 있는 예술품인 거죠.”

플로리안 후프나겔 노이에 잠룽 관장은 “애플의 휴대전화 ‘아이폰’이나 통신위성도 우리 미술관의 8만여 소장품 중 하나”라고 말했다.
엄숙했던 미술계가 그림이나 조각 같은 전통적인 미술작품에서 컴퓨터·휴대전화 등 첨단 기술 제품으로 전시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첨단 제품을 현장에서 직접 만들고 있는 뱅글에게 전시공간 자체를 기획하도록 한 것은 “새로운 작품은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철학에서다.
산업 현장에 있는 뱅글의 전시 방식은 일반적인 큐레이터의 작업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자동차는 사람들이 직접 만지고 느끼고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리석 조형물 역시 마음대로 만져볼 수 있게 만들었다.

손으로 대리석을 만져보는 사람, 뺨을 대보는 사람, 문질러보는 사람, 살짝 긁어보는 사람… 모두들 진짜 자동차를 대하듯 즐거워한다. 기자도 볼록하게 나온 대리석 표면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차갑고도 매끄러운 감촉이 스포츠카처럼 기분 좋다. 권위 있는 미술관이 아니라 편안한 체험 학습장에 온 듯하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리고, 다들 큰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07년 문을 연 피나코테크 모데르네가 하이테크를 수혈받아 새롭게 피어나고 있었다.

후프나겔 관장은 “이제 미술관도 전시품을 성스러운 물건처럼 경배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품을 존경할 게 아니라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조용히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젊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즐겨 찾아야지요. 50년 전하고 똑같이 하면 누가 오겠습니까?”

그는 앞으로도 최첨단 산업 디자이너들을 전시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기업들은 아트 페어를 열고, 오페라단을 후원하는 등 경제적 지원을 통해 예술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노이에 잠룽의 실험처럼 첨단 산업기술 자체가 예술활동과 결합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토마스 길스트 BMW 문화활동 담당 대변인은 “예술가들이 자동차를 만드는 데 쓰는 특정 기술을 작품에 활용하고 싶다면서 문의해 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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