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X세대>4.핀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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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전통적인 북구의 복지국가 핀란드.태어나기만 하면 죽을때까지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는 핀란드.최근 불어닥친 경제불황은 인접국인 소련.동구의 몰락과 함께 이 나라 젊은이들의 삶에 조용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교육만이 행복을 보장한다는 믿음을 깨고 청소년들이 하나 둘씩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제 삶은 여행가방에 있어요.』-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떠나는야나(18)의 말이다.그녀는 조그만 가방 하나를 들고 파리의 어느 가정에 아이보는 사람으로 간다.다행히 학교에서 프랑스말을배운 덕분에 얻어진 자리다.『어디에 있든지 일자리 가 있는 곳이 내가 살 곳』이라는 야무진 생각이다.최근 핀란드에는 청소년「해외 취업」을 알선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있다.이들은 18%나되는 국내 실업을 완화해 주는 고마운 역할을 하기도 한다.
청소년의 취업이 늘어남에 따라 아이는 공부,어른은 일이라는 삶의 등식관계가 무너지고 있는게 새로운 사회풍조라고 헬싱키대학의 헬레나 헬베(46)박사는 지적한다.
『여가요? 그게 뭐예요.』헬싱키 대 도서관에서 시험공부에 열중인 역사학과 3년생 야리(19)는 반문한다.『남는 시간에 뭘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이처럼 일격을 가한다.『아침에 강의 듣고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 5시까지 일하러 가야 합 니다.』정말로 그는 쉴 틈이 없다.
양로원에서 일하는 그는 아픈 노인들을 돌보느라 밤에도 일할 때가 많다.집에 오면 보통 11시.주말에는 밀린 공부하랴,청소하랴 교외에 나가 한적한 시간을 가져본 지도 오래다.불과 4~5년전만 해도 핀란드 대학생들은 천국과 같은 삶을 살았다.등록금도 없는데다 학생이란 이유로 매달 1천5백마르크(한화 10만원)씩 국가에서 보조를 받았다.은행에서 대부도 쉬웠다.
연간 1만5천마르크(1백만원)씩 재학기간 내내 빌려 쓸 수 있었다.이 돈은 취직한 후 갚으면 됐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은행은 학생을 기성세대와 마찬가지의 「고객대우」를 한다.대부금에 10%이자가 붙고 졸업후 취직을 못하더라도 2년내 갚아야 한다.학생은 더 이상 특권층이 아닌 것이다. 일을 하기는 고등학생들도 마찬가지다.헬싱키 시청의 청소년 담당과장 톰미(36)에 따르면 핀란드 고등학생의 45%가파트타임 일을 갖고 있다고 한다.『학교가 4시에 끝나면 곧장 이리 와서 8시까지 일해요.수업이 없는 토요일은 아침부 터구요.』슈퍼마켓에서 일하는 고등학교 2년인 야나(16)의 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임시 실업자다.가족은 국가의 지원으로 먹고 산다.그녀가일하는 이유는『컴퓨터나 자전거를 사야 되는데 부모가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시간당 6달러 정도 받는데 1주일에 많이 일하면 40시간까지 일할 수 있다 .
고등학생들의 취업이 느는 이유는 대학졸업장이 직장을 더이상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졸업장이 있다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좋은 직장들은 예외없이 좋은 학벌을 요구해요.』어른들의 편견을 은근히 꼬집는 사리(18).그녀의 부모는 책가게 점원으로 일하는 사리에 대해 못마땅해 한다.『좋은 직장이란게 따로 없어요.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제일 좋은 일이지요.
』 여러가지 일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풍요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라는게 기자가 만난 취업 청소년들의 공통적 생각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청소년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신들을 위한 일자리를 늘렸다.『아이들은 식당이나 청소.창고지기등 무슨 일이나 하려 듭니다.』임금도 싸지만 긍정적 태도때문에 청소년들을 고용한다는 한 기업인의 말이다.
취업을 하게 된 아이들은 하나 둘씩 부모곁을 떠난다.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혼자 집을 얻어 나가는 아이들의 수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동거나 결혼연령도 낮아지고 있다고 톰미는 말한다.
***부모세대에 존경심 이들의 가족관은 상당히 건전하다.기성세대들이 이혼율 50%라는 세계적 기록을 갖고 있음에 반해 30세미만의 이혼율은 극히 미미하다.물질적 어려움과 실업에 대한공포가 가족들을 뭉치게 하는 것 같다고 헬베박사는 말한다.
일찍 가정을 떠나 개인적인 삶을 추구하는 신세대들이지만 기성세대와의 정신적 유대는 의외로 단단하다.『소련과 동구의 개방 이후 아이들이 다른 나라를 많이 가보게 됐어요.거기서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커진 것 같아요.』17세와 20세의 두 아들을 두고 있는 한 어머니는 젊은층의 조국관을 이렇게 설명한다.러시아와 싸워 조국을 지켜준 부모세대에 대한 존경심은 청소년들의 군대에 대한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실제로 기자가 만난 남자아이들은 모두 예외없이 군복무가 의무라는데 이견이 없었다.또한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직업중에 군인과 경찰이 많다고 헬싱키신문 기자인 일카(39)는 귀띔한다.
핀란드의 젊은세대들은 다른 나라와 달리 도덕성에 있어 기성세대에 비해 상당히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한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 범죄는 기성세대에 비해 아주 적다고 한다.특히 절도는 거의 없다고 한다.풍요속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쉽게 가난이나 실업에 감염되지 않는다는게 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풍요속에서도 늘 내일을 불안해 하던 전쟁세대와 달리 고르게 웃는 치아에 드러난 이들의 낙관성이 핀란드 사회의 미래인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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