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위안부 할머니 보듬기 1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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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의 신혜수대표, 김동희.안미현.강주혜.스다 가오리 간사와 윤미향 사무총장(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스다 가오리씨는 5년동안 자원봉사를 하다 올해부터 활동가로 뛰는 일본인이다. [박종근 기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신혜수(53) 대표를 비롯, 윤미향(41) 사무총장과 4명의 간사들은 지난주 일주일 동안 사무실 한쪽 휴게실에서 새우잠을 잤다. 탤런트 이승연씨의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누드 촬영 사건이 터지면서 울분을 토하는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몰려드는 취재진에게 할머니들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1년에 십여차례는 밤샘 작업을 해요.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인권 캠프나 추모회.문화행사 등을 준비할 때면 다들 단단히 각오를 하지요."

누드 필름이 소각되면서 사태가 수그러들던 지난 19일.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사무실을 나서던 활동가들은 "우린 자발적으로 강제연행된 사람들"이란 우스갯소리를 하며 환한 웃음으로 쌓인 피로를 털어냈다.

1990년 11월 이효재.윤정옥씨 등에 의해 결성된 정대협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거질 때면 항상 그 현장에 있었다. 위안부 문제가 일본 및 한국 정부는 물론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질 때도 할머니들을 지켜온 이들은 정대협 활동가들이었다.

"부끄럽다며 고개를 숙이고 다니던 할머니들이 당당하고 씩씩해진 게 무엇보다도 큰 보람이에요." 윤총장은 "할머니들은 죄인이 아니며 일본 정부에 의해 계획된 범죄의 피해자라는 것을 일깨워 주자 변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물론 이 같은 대화가 있기까지 활동가들은 아프다는 연락을 받으면 한달음에 달려가고 한많은 사연을 수도 없이 들어주고서야 할머니들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후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힌 할머니들은 모두 2백12명. 이 중 생존자는 지난해 말 현재 1백33명이다.

"전문가들이 교통비 정도만 받고 생존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증언을 듣고 기록으로 남겼어요. 할머니들 대부분이 연로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이 작업 덕분에 27명의 할머니들의 증언은 20분짜리 개별 영상물로 제작됐다. 또 50명의 할머니들의 육성을 테이프에 담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비디오 테이프도 20여종을 만들고 역사적으로 분석한 각종 연구서적들도 30권이 넘는다.

정대협은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지난한 작업을 해왔다. 11년 세월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개최된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는 이번주 5백97회를 맞는다.

수십차례의 부인과 번복 끝에 일본 정부는 93년 일본군이 개입해 위안부를 강제적으로 징발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법적 배상은 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상태. 이 과정에서 정대협 활동가들과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현해탄을 건넌 횟수만도 1백차례가 넘는다.

특히 신대표는 유엔 인권위원회.유엔 국제노동기구 등 국제기구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느라 한해동안에 4~5차례 비행기를 타야했다. 정대협의 외롭지만 끈질긴 활약 덕분에 유엔 인권위원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법을 위반한 범죄로 인정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을 요구했으며 피해자에 대한 개별 배상과 가해자 처벌을 권고하는 성과를 끌어냈다.

신대표는 "관심이 수그러드는 국내에 비해 외국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살아나고 있다"고 전했다.

정대협은 지난해 12월 18일 정대협 활동의 전기를 맞는 새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전쟁으로 짓밟힌 여성 인권을 바로 세우는 역사 교육의 장인 '명예와 인권의 전당'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위안부로 희생당한 여성들을 추모하고 다시는 전쟁으로 인한 여성의 인권유린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념관이 건립되면 정대협이 모은 위안부 관련 책 수천권과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할머니 관련 자료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또한 김학순 할머니의 성경책과 강덕경 할머니가 사용하던 그림 도구들, 그리고 종이 점토로 떠놓은 얼굴 마스크, 손 도장 점토 등 할머니들의 체취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일상용품들도 보관될 예정이다.

"황금주 할머니가 5백만원을 비닐로 싸고 또 싸서 갖고 왔을 때 우리 모두 눈물이 핑 돌았어요." 김동희 간사는 이용수 할머니가 2백만원을 약정하는 등 할머니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돈 1천만원이 기념관의 주춧돌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누드 촬영 사건 이후 종군위안부누드반대 카페에서는 전당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져 2천여만원이 모였다. 이들은 1억원 모금을 목표로 정하고 모금운동 알리기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오랫동안 기억하는 일이 이기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신대표는 "온 국민이 한푼 두푼씩 모아 벽돌을 쌓고 기둥을 세울 때 기념관의 의미는 더해질 것"이라며 동참을 호소했다.

02-365-4016. 후원계좌는 조흥은행 308-03-009542, 예금주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문경란 여성전문기자<moonk21@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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