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내 마음 나도 모르는데 … "내가 왜 네 거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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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영화‘기다리다 미쳐’는 군복무를 매개로 네 커플의 연애담을 병렬적으로 진행한다. 큰 사진은 인디밴드 선배 민철(데니안)과 그를 짝사랑하는 보람(장희진). 아래 작은 사진은 닭살스러운 동갑내기 대학생 커플 은석(김산호)과 진아(유인영).

때가 되면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만국공통이되, 때가 되면 남자는 군대 가고 여자는 곰신(고무신)이 되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기다리다 미쳐’는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발상의 전환이, 즉 기획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그동안 군대 문제를 다룬 로맨스물이 없었던 게 새삼 신기할 정도다.

물론 기획력이 전부는 아니다. 군복무를 매개로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다양한 청춘의 연애풍속도가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아릿하게 그려진다. 실제 연인들에게서 취재한 듯, 생생한 디테일이 영화 전반에 탄력을 더한다.

직장인 연상녀와 대학생 연하남 사이의 미묘한 경제적 갈등, 캠퍼스 커플의 닭살 행각, 반대로 연애와 담쌓은 알바(아르바이트) 중독증까지, 요즘 청춘의 풍속도가 고루 담겨 있다. 21세기 한국 청춘의 단면을 보여주는 영화로 이모저모 손색이 없다.
 
영화의 주요 인물은 6살 차이의 연상녀 효정(손태영)과 연하남 원재(장근석), 동갑내기 대학생 진아(유인영)와 은석(김산호), 진한 부산 사투리의 웨이터 욱(우승민)과 나이 어린 동거녀 비앙(한여름), 그리고 인디밴드의 선배 민철(데니안)을 짝사랑하는 보람(장희진)까지 모두 네 커플이다. 네 남자가 같은 날 훈련소에 입소하면서, 이들의 사랑은 저마다 새로운 곡선을 그리게 된다.

서른이 코앞인 물리치료사 효정은 원재의 화려한 연애 행적을 뒤늦게 알고 분통을 터뜨린다. 원재는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후 자잘한 갈등이 중첩되면서 둘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다.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는 것은 대학생 진아다. 남자친구의 입대 이후에도 선물공세로 유치 찬란하게 애정을 드러내던 진아는 하룻밤 취기와 혈기로 그만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내게 된다. 발칙한 소녀 비앙은 이내 새로운 동거남을 구한다. 인디밴드의 멤버 보람은 선배 민철을 면회 가서 민망하고 처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려 한다.

 ‘기다리다 미쳐’는 네 커플의 연애담을 병렬적으로 연결한다. 그러면서도 저마다 기승전결을 이루도록 오밀조밀 엮어가는 솜씨가 탄탄하다. 다양한 에피소드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네 커플의 배우들이 고루 매력을 발하게 하는 것 역시 강점이다.
 
군대 간 남자친구의 대용품 역할을 하던 친구와 하룻밤을 보내고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고민하는 진아, 짝사랑의 열병을 나 홀로 앓는 보람 등 여자들의 심리가 어느새 영화 속에 큰 무게를 차지한다.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짝사랑하는 보람의 사연은 일종의 성장통으로 전이된다. 보람은 드러나지 않았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밴드의 새로운 보컬이 된다. 보람과 민철이 활동하는 인디밴드의 공연을 빌려, 영화 속에 흘러나오는 리듬 역시 청춘영화 특유의 감성을 더한다.

가수 출신인 데니안은 큰 무리 없이 합격점을 받을 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타고난 사투리에 맞춤한 캐릭터로 첫 연기에 도전한 우승민의 활약도 돋보인다. 짝을 이룬 한여름과 영화 곳곳에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다만 교복을 입는 미성년자 비앙의 동거생활에 대해 뭔가 관객의 이해나 양해를 구해야 할 배경설명이 생략된 듯 보이는 게 흠이다.
 
사랑에 조바심 내고, 실수에 속앓이하는 연애의 속성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어도, 현재형의 연애풍속도를 섬세하게 포착한 점에서 새로운 맛이 나는 영화다. 신인 류승진 감독의 데뷔작이다. 내년 1월 1일 개봉. 15세 관람가.

주목!이 장면 군대 간 남자친구를 배신한 사연이 드러나는 순간, 진아는 항변하듯 “내가 왜 네 거냐”라고 외친다. 내 마음조차도 내 뜻대로 안 되는데, 왜 내가 네 것이냐는 항변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하다고 믿을 때라야,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이 영화의 밑바닥 메시지가 데시벨 높게 울려 펴지는 대목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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