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그곳은 내 마음의 고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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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운동장과 그곳 상가는 내게는 영원히 이루지 못할 기적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나게 했다. 유니폼이나 축구화 같이 축구 하는 데 필요한 것을 사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내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23일 동대문운동장 스포츠용품 상가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는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의 목소리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동대문운동장에 들어선 70여 곳의 상가들은 운동선수들에게는 운동장만큼이나 중요한 존재였다. 운동에 필요한 모든 물건이 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0여 년간 한국 스포츠의 성장을 지켜본 이 상가들은 동대문운동장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수제 축구화에서 심판용 카드까지=운동기구 상가들은 1966년 동대문운동장이 리모델링돼 현재의 모습을 갖추면서 입점했다. 유니폼 상가는 6년 뒤 운동장 앞에 지하상가가 만들어지면서 입점했다. 처음에는 상인들이 손수 만든 축구화.축구공.야구배트를 팔았다고 한다. 이곳의 터줏대감인 휠라매장 조철현(62) 사장은 "80년대 초 아시안 게임 유치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브랜드 용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90년대 말부터는 웰빙 바람으로 인라인스케이트.러닝머신.자전거 같은 건강.레저용품이 인기를 누렸다. 소비 수준이 올라가면서 스키.스노보드도 인기 품목이 됐다. 최근에는 박태환 선수의 인기로 수영복과 수영도구를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조 사장은 "축구심판용 옐로.레드카드도 있고, 미식축구선수 보호대도 있고 운동과 관련된 것은 없는 게 없다"고 자랑했다. 유행과 시대에 따라 파는 물품이 변해 왔지만 과거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아직도 가업을 이어 수제 축구화를 파는 곳도 있다. 첨단과 전통이 공존하는 셈이다.

◆세계적 명소, 유니폼 지하상가=운동장 상가가 스포츠용품을 공급했다면 26곳에 이르는 지하상가는 유니폼으로 유명하다. 가게 규모는 대부분 6.6㎡(2평) 남짓이지만 이곳에서 하루 수백 벌의 유니폼이 전국으로 팔려나간다. 프로구단이나 기업 지원을 받는 유명 팀을 제외한 유소년팀과 각종 동호회, 조기축구.야구회는 대부분 이곳의 고객이다. 서정원.이천수 등 유명 선수들도 유소년 시절에는 이곳에서 맞춘 운동복을 입고 뛰었다. '현대스포츠'의 나상혁(48) 사장은 "대회에서 우승한 고교팀 감독이 '여기 옷을 입고 뛴 덕에 이겼다'고 전화할 때는 마치 내가 우승한 기분이 들었다"며 흥분했다.

지하상가에는 해외 고객도 많다. 유니폼 상하 한 벌 가격이 3만원대로 유명 브랜드보다 훨씬 싸지만 디자인은 세련됐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말레이시아.태국.우즈베키스탄은 물론 아프리카에서 온 선수들도 경기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면 여기 와서 박스째 유니폼을 맞춰 간다"고 입을 모았다.

◆스포츠메카, 추억 속으로=두 상가의 소유자는 서울시다. 시는 내년 4월 말까지 운동장과 지하상가를 철거한다. 2010년까지 이곳에 공원과 디자인플라자를 세울 계획이다. 공원 지하에 상가도 들어서지만 스포츠용품은 입점 대상에서 빠졌다. 디자인플라자의 컨셉트에 어울리는 상품만 선별해 매장을 허용키로 했기 때문이다. 시는 대신 반포나 잠실의 다른 지역 상가로 이전하라고 제안한 상태다.

하지만 상인들은 '동대문운동장=스포츠용품'이란 이미지를 잃을 수 없어 떠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유니폼에 등번호나 학교 마크를 달아주는 '대한사'의 박영길(59) 사장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스포츠용품의 메카를 대안 없이 해체하는 것은 안목이 부족한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차범근 감독도 "스포츠용품 판매공간을 더 세련되게 만들면 될 것"이라며 "한국 축구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곳을 없앤다니 아쉽다"고 말했다.

글=민동기.한은화 기자 ,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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