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41> 버려야 채울 수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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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18면

낯선 전화번호였다. 국가대표팀의 일본 전지훈련이 한창이던 11월 중순께였다. 오키나와에서 전화가 왔다. 박찬호였다. 낯선 곳에서, 낯선 시간에 걸려온 전화여서 뭔가 마음에 걸렸다. 생각했던 대로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한창 운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 아닌가. 뭘까.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그는 ‘문제’라는 단어를 썼다.

“다저스와 계약이 잘못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올림픽 예선에 나가는 걸 원치 않는다면서,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합니다.”

그는 침착하게 설명을 했다. 다저스가 부상의 위험을 이유로 자신이 올림픽 예선에 출전하는 걸 꺼린다고. 그 계약을 확보하자면 지금 참가하고 있는 대표팀 훈련을 중단하고, 당장이라도 미국으로 가 계약할 수 있다고. 그러나 대표팀 일원으로 올림픽 예선
참가를 고집할 경우 다저스와는 대회가 끝난 다음에 다시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순간, 그가 LA 다저스와 계약에 합의했다며 보내온 문자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때가 11월 8일. 그는 친정팀 유니폼을 다시 입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 기쁨이 실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쉬워했다. 그렇지만 마음의 결정은 이미 내린 뒤였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어 했다.

“(다저스는) 올림픽 예선에 나가지 않는다면 계약을 하겠다고 하는데, 지금 감독님과 동료들을 떠난다는 건 생각할 수 없어요. 대만으로 갈 겁니다. 국가대표는 이번이 마지막일지 몰라요. 내가 그렇게 해서 다저스와 인연이 어긋난다면 할 수 없는 일이겠죠.”

별다른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저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대만에 많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올 것이며, 활약 여부가 빅리그 단장들에게 전달될 거라는 정도의 말밖에. 그게 인사였다.

전화를 끊고 그의 선택을 되새겼다. 그는 자신이 얻은 것을 버렸다. 그리고 실리보다 명분을 택했다. 2001년 다저스를 떠나 텍사스 레인저스로 갈 때와는 반대였다. 그때 박찬호는 명분보다 실리를 골랐었다.

그렇게 박찬호는 대만으로 갔고, 대표팀 주장으로 뛰었다. 그 선택의 결과는 어떻게 됐나. 6년 전과 반대였다.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던 텍사스 레인저스행은 실패였지만, 다저스와 계약이라는 실리 대신 국가대표팀 주장이라는 명분을 택한 이번 선택은 성공이었다.

그는 대표팀의 리더로서, 투수진의 맏형으로서 인정을 받았고, “역시 박찬호”라는 평판을 얻어내며 야구인 모임 일구회로부터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대중적 호감도 회복했는지 일부 광고대행사에서는 모델 제의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다저스와의 계약도 얻어냈다. 그가 오키나와에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불안해 했던 것들을 그는 모두 얻었다.

박찬호가 다저스행에 집착하지 않고 대표팀을 선택해 얻어낸 결과를 보면서 “버려야 얻는다”는 금언을 되새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도 떠올린다. 그래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집착하며 거기에 더 채우고, 더 얹어놓기 위해 애쓰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버릴 수 있는 용기,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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