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암94>6.여성계-性희롱 파문 사회에 경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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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피고 申○○씨는 원고 禹○○씨에게 3천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 순간 1백여명의 방청객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법정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뒤덮였다.원고 禹씨를 비롯, 몇몇 여성방청객들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닦아냈다.
지난 4월18일 서울민사지법 합의18부 법정.94년 여성계의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는「성희롱사건」의 1심 승소판결 현장이다. 이른바「서울대 우조교사건」으로 불려지는 성희롱 사건이 3천만원이라는 거액(?)의 배상 승소판결을 받음으로써 성희롱 문제가 올봄 우리 사회에서도 본격적으로 사회문제화되었다.판결직후「어깨만 건드려도 3천만원」식으로 희화화(戱畵化)되기 도 했지만 성희롱이란 단어는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생생히 각인되어 우리사회에 만연한 성희롱 분위기에 일대 경종을 울려주었다.
그러나 이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94년 여성계를 결산하는 대차대조표는 오히려「적자」(?)쪽에 가깝다.굳이 낙관적으로 평가하자면 내년의 수확을 위해 올한해는 씨뿌리고 가꾸기에 치중한 한해라 할 수 있다.
우선 성과부터 따져보면▲성희롱 사건의 승소판결▲군복무가산점제의 소폭 하향조정▲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각종 활동▲여성계의 각종 연대결성등이다.
반면▲여성근로자의 불완전 고용 확대▲가족의 해에 대한 산발적이고 미진한 활동▲영유아보육법등 각종 법안개정의 유보▲여상고 졸업자 채용때 용모를 제한해 채용한 기업체의 고발과 검찰의 기소유예 방침등은 여성계의 미흡한 활동 또는 새해로 넘어가는 과제로 지적될 수 있다.
공무원 채용때 군복무자에 주어지던 가산점 축소는 여성공직자 배출의 길을 넓혔다는 점에서 올한해 여성계의 또 하나 수확으로꼽을 수 있다.이화여대 행정학과 학생.교수등 2천여명이 국무총리실 산하 행정쇄신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여론화되기 시작한 군복무가산점제는 보훈처를 비롯,재향군인회등의 국방.안보논리를 앞세운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소폭이나마 하향조정되는 성과를 거뒀다.
행쇄위의 결정은 7급 공무원 채용때 만점의 5~2.5% 가산해주던 것을 3~1.5%로 낮추며,9급 국가직은 5~2.5%에서 4~2%로 낮춘다는 것.
그러나 이 사건은 언론의 집중적 보도와 정무장관실(제2)의 노력에 비해 정작 여성계는 별다른 움직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가산점제 폐지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했다. 「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연대」「95 베이징(北京)세계여성회의 참여를 위한 NGO한국위원회 발족」「국회내 여성특별위원회 신설 연대청원」「가정폭력 방지법 추진을 위한 전국연대」등전여성계의 연대결성은 94년 여성계 활동 양상의 가장 큰 변모로 주목된다.
당장 눈앞의 결실은 적지만 이같은 연대활동은 전여성계의 역량을 한데 모아 앞으로의 풍성한 수확을 기약하는「씨뿌리기」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지난 8월31일 창립대회를 가진「할당제도입을 위한 여성연대」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한국 여성단체연합을비롯,56개 여성단체들이 참여했다.이 연대는 내년 6월 치러질지방자치의회 선거등 4개의 선거에서 최소한 전체 공천중 20%여성 할당과 특히 복수 당선지역에서 반드시 여성을 공천토록 정당에 압력을 가하는 활동을 전개 했다.
또 내년 9월 베이징에서 개최되는「세계여성회의」참가 준비를 위해 12월7일 80개 여성단체들이 결성한「NGO한국위원회」는이미 지난 10월20~23일 일본에서 개최된 제1회 동아시아 여성포럼에 참가하는등 착실한 활동을 폈으며 내년 베이징에서 한국여성의 위상을 전세계에 알릴 프로그램 준비에 한창이다.
이같은 연대활동과는 별도로 올해는 여성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개별 단체들의 활동도 여느 때보다 많았다.여성후보자의 발굴과 교육,정치참여 부진의 원인과 대책등을 모색해보는 각종 세미나 개최,20% 여성할당제 건의,선거자원봉사자 훈련 ,활동 기금 마련을 위한 후원행사등 내년을 여성 정치참여 원년으로 만들고자하는 여성계의 한결같은 의지가 두드러진 해로 평가된다.
***국제활동에 눈떠 전 사회적인 국제화 바람 속에서 여성계도 올해는 국제 활동에 눈뜬 해였다.한국정부가 올해 처음으로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의 옵서버국에서 위원국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는가 하면 베이징 세계 여성회의의 각종 준비회의와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 를 위한 아시아권 여성들의 연대모임 참석등 민간여성.정부 모두 국제화의 초석을 놓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세계 인구회의와 같은 여성관련 회의가 무관심속에 지나치는등 아직은 세계속에서 한국여성계의 활동과 자리매김이 미숙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밖에도 성차별적인 제도의 고발과 성평등적 정책등을 제안하는「평등의 소리」창구개설,여성관련법을 국회에서 전문적으로 논의.
심사할 국회여성특별위원회 탄생,최초의 여시장(全在姬 광명시장)탄생,첫 국회 여성국장(愼鏞子) 탄생등도 주목되는 성과들이다.
그러나 여성계는 유엔이 정한「세계 가족의 해」와 관련,현대 가족이 안고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가족공동체 구성과 가족문화를 모색하는데는 소극적이었다.가족관련 학회를 중심으로 현대가족의 문제를 해부해보는 세미나들이 산발적으로 개 최됐을 뿐이었다. 박한상군 부모살해.지존파.온보현 사건등 온 사회를 경악시킨 대형 사건들의 주요원인이 궁극에는 문제있는 가정에 귀결되었어도 여성단체들은 가족이기주의를 뛰어넘어 오늘에 맞는 새로운가족윤리등을 모색하는데 실패했다.다만 한국 여성단체 협의회와 한국여성민우회등의 민주적이고 평등한 가족 확산운동은 새로운 시도로 평가된다.
한편 임시직.시간제고용.용역업 등과 같이 여성취업자들의 불완전 고용 확산과 정부의 생리휴가 폐지검토,남자중심의 인턴사원제채용 확산 등에 대해 여성계는 여성취업의 적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더구나 한국여성민우회등이 여상고 졸업자의 채용때 체중.키등을 제한해 채용한 44개 기업체를 고발한 사건에 대해 검찰이최근 기소유예 방침을 굳힌 것으로 알려짐에 따라 여성계는 바짝긴장한 상태다.
이 사건을 통해 아직도 여성을「직장의 꽃」으로 여기는 우리 문화풍토에 일침을 가했던 여성단체가 용모제한 채용이 여성간의 차별일 뿐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이 아니라는 검찰의 법해석에 어떻게 대응해 갈지 주목되고 있다.
또한 남녀고용평등법.영유아보육법 개정,동성동본 금혼 폐지등 여성관련법 개정을 이루지 못한채 내년의 숙제로 넘기게 돼 많은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다.
〈文敬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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