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연의패션리포트] 연아는 왜 진분홍을 입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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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크가 주는 편견 중의 하나는 일단 ‘유치함’이다. 핑크는 여자 아이의 상징이다. 분홍 이불을 덮고 분홍 배냇저고리를 입고 자란 여자 아기는 소녀가 되어서도 분홍색을 사랑한다. 핑크는 대개의 소녀들이 꿈꾸는 ‘공주가 되고 싶은 환상’이자 여성성의 상징이다. 할리우드 영화 ‘금발이 너무해(Legally Blonde)’의 여주인공은 온몸을 핑크로 치장한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방 전체는 물론 노트북까지 핑크를 고집한다. 소녀들이 얼마나 핑크색에 집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다.

 며칠 전 토리노의 그랑프리 파이널 갈라쇼에서 눈길을 끌었던 김연아의 스팽글 톱과 바지 차림의 의상도 연한 핑크였다. 김연아가 ‘저스트 어 걸’이라는 노래에 맞춰 보여준 깜찍하고 발랄한 연기와 핑크빛 의상은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핑크는 여아와 남아의 성을 구별하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최근엔 좀 더 색다른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남성 동성애자인 ‘게이’를 지칭하는 말이 된 것이다. 예를 들어 ‘핑크 달러(Pink Dollar)’ 혹은 ‘핑크 이코노미(Pink Economy)’는 남성 동성애자 사회의 구매력을 의미하는 용어로 분류되기도 한다.

 또 핑크는 전혀 뜻밖에 유방암 예방 캠페인을 의미하는 컬러로도 쓰인다. 각종 협회나 기업에서 벌이고 있는 캠페인에 ‘핑크 리본’을 등장시켜 가장 위험한 암 중의 하나인 유방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올가을과 겨울 시즌에 패션 디자이너들이 애정을 쏟고 있는 핑크는 조금 남다르다. 일단 유행을 몰고 온 핑크는 ‘여자 아이’를 상징하는 부드럽고 연한 파스텔 톤의 핑크가 아니다. 채도가 높고 강렬한 푸크시아 핑크다. 파리나 밀라노, 뉴욕 컬렉션에서 발표된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에서는 매우 여성스럽고 우아한 실크 드레스에서부터 스포티한 면 소재의 티셔츠까지 다양한 아이템에 걸쳐 핑크 컬러가 포진되어 있다.

 그런데 이번 시즌엔 그 ‘유치하게만 보였던’ 핑크 컬러가 보다 성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그 예를 프라다나 랑방, 크리스찬 디올 브랜드에서 볼 수 있다. 이들 브랜드에서는 각각 깔끔한 디자인의 하이힐이나 우아한 곡선의 원피스, 트렌치코트나 사무실에서도 입을 수 있는 H라인의 펜슬 스커트 등 여성적인 아이템에 핑크를 대입시키고 있다.

 자칫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진한 핑크색 아이템들은 실제로 어떻게 입어야 할까? 원피스나 코트 같은 아이템이 지나치다고 생각되면 구두나 백 등의 액세서리로만 활용하는 것이 좋다. 블랙이나 그레이 등의 무채색 계열과 함께 매치하면 보다 편안한 느낌을 주면서 악센트를 살릴 수 있다.

 한편 핑크 트렌드는 패션뿐 아니라 뷰티 제품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바비 브라운 마케팅팀의 권태일 과장은 화장품의 핑크 바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번 연말 한정 제품으로 선보인 ‘핑크 쿼치’라는 볼 전용 제품의 반응이 좋다. 기존의 핑크에 약간의 골드 터치를 넣어 더욱 글래머러스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보통은 핑크 컬러가 봄·여름 시즌에 더 반응이 좋은 편인데, 이번에는 아주 의외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바비 브라운은 말했다. “핑크는 전 우주적으로 여자들을 예뻐 보이게 하는 절대적인 컬러다.”

 가장 여성적이면서도 사랑스러운 컬러, 핑크에 대한 패션계의 애정은 올겨울로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내년 봄에도 핑크의 매력에 빠진 디자이너들의 애정 공세는 계속될 거라는 게 패션계의 공통적인 견해다. 주말 쇼핑 목록에 ‘핑크색 아이템’을 써 넣을 때가 됐나 보다.

강주연 패션잡지 엘르 수석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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