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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206.백담사行 청산아닌 새갈등의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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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백담사 유배생활은 5共청산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었다.백담사는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 일행에게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백담사라는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채 全前대통령 일행을 실은 승용차는 남양주~양평~홍천등 정상코스를 거치지 않고 엉뚱하게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다시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가 거꾸로 홍천으로 거슬러 올라와 백담사로 향 하는 우회코스를 택했다.취재진을 따돌리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기습시위도 우려돼 지그재그로 우회했던 것이다.
그래서 백담사에 도착한 것이 88년 11월23일 오후3시30분쯤.며칠전 내린 눈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유배지는 이미 완연한겨울이었다.그런데 「뭔가 이상한」 것은 따돌렸다고 생각한 보도진들이 미리 도착해 카메라를 들이댔던 것이다.멋 쩍기도 했지만황당하지 않을수 없었다.청와대에서 약속을 어기고 언론에 백담사行을 흘렸다는 얘기다.
문제는 보도진과 마주친 이순자(李順子)여사가 오는 동안 감정을 가라앉혔는지 얘기도중 엷은 미소를 지은 것이다.웃는 모습은곱지 않던 여론에 「참회할줄 모르는」 인상으로 비쳐졌다.당연히행선지를 미리 알렸다고 생각되는 6共 청와대에 대한 감정이 처음부터 꼬일 수밖에 없었다.백담사가 시작부터 참회의 場,해원(解寃)의 도량이 아니라 포한(抱恨)과 인고(忍苦)의 장소로 되어버린 것이다.
먼저 일상의 불편함에서 비롯된 恨부터 차곡차곡 눈처럼 쌓여갔다.백담사의 환경은 전직대통령이 살기에 너무나 열악했다.全前대통령 부부가 묵을 요사채 아궁이에 군불을 때자 매운 연기가 방안으로 몰려 눈을 뜰수 없을 정도였다.겨울에는 머 무를 사람이없어 구들장이 내려앉은 것을 고치지 않고 방치했다가 全前대통령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하루전 부랴부랴 도배만 했기 때문이라는설명이었다.연기가 들어오는 뒷문을 봉하고 외풍을 막기 위해 담요를 끈에 매달아 문쪽을 가렸다.전 기가 안들어와 두 자루의 촛불을 켰지만 썰렁한 어둠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이 때문인지 백담사에 도착한 全前대통령부부는 이틀간 두문불출했다.특히 全前대통령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버텨 금방 텁수룩한 모습이 됐고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한때문인지 매일밤 끙끙 앓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틀간의 칩거뒤 全前대통령은 모든 것을 털고 방을 나섰다.적어도 외양상 그는 이틀간의 진통 끝에 마음을 깨끗이 비운 듯했다.특유의 정면돌파,적극적인 적응을 시작한 것이다.그는가장 먼저 『절에 왔으니 절 일정표에 맞춰 생활 하겠다.예불도스님들과 같이 하겠다』며 절 일정표를 횐 종이에 적어 벽에 붙이고는 본격적인 산사(山寺)생활에 들어갔다.제대를 눈앞에 둔 말년 병장이 전역일을 기다리며 달력날짜 위에 가위표하듯 백담사벽에 걸린 달력도 하루 하나씩 가 위표가 더해졌다.
산사생활을 시작한지 6일째인 29일 全前대통령부부는 예불에 참여하기 시작했다.예불은 새벽4시부터였기에 3시30분이면 일어나야했다.일어나는 것도 어렵지만 불당을 얼어붙게하는 추위는 6共 청와대에 대한 원망과 함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12월 중순이 되면서 추위는 영하 10도를 밑돌았고,하룻밤새 내린 눈이사람 키를 넘겨 경호원들이 눈 사이로 터널을 만들어야했다.
일상의 불편함이 6共 청와대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백담사까지 옥죄어오는 권력의 비정함 이었다.
가장 먼저 전기시설과 눈덮인 계곡을 오갈 차량지원을 요청했으나 백담사 관리를 맡은 청와대 경호실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12월1일에는 인제로부터 익명의 전화가 와 『오늘 12시부터도청장치가 설치되니 주의하십시오』라고 제보해왔다 .이후 모든 중요한 일은 전화로 하지 않고 직접 사람이 오가며 메시지를 전해야했다.
권력의 감시망은 보다 구체적인 외부인 출입통제로 구체화됐다.
全前대통령이 백담사에 도착한 날 저녁식사중 지역관할 3군단장과12사단장이 각각 보안부대장을 데리고 인사차 온적이 있었다.이들은 그해 연말인 12월31일『미리 세배를 드리 겠다』며 다시찾아왔다.그런데 얼마뒤 보안사에서 경위조사를 한다는 얘기가 들렸다.그리고 국방부로부터 『군지휘관들의 백담사 출입을 금한다』는 구두지시가 떨어졌고 두 장성은 이현우(李賢雨)경호실장으로부터 별도의 경고를 받았다는 얘기가 들렸다.아니나 다를까.군단장은 얼마뒤 한직으로 물러났다가 군복을 벗었다.이 무렵 백담사 사람들을 더욱 격분시킨 것은 대검 중앙수사부에서 5共비리 특별수사를 통해 5共 핵심인사를 사법처리한다는 소문이었다.백담사行협상에서 측근들에 대 한 사법처리가 없어야한다는 묵계가 있었지만 백담사行 이후에도 계속된 각종 청문회 열기는 청와대나 백담사의 묵계를 인정하지 않았다.당시 야당에서 요구한 구속처리 5共 핵심은 장세동(張世東)前안기부장.허문도(許文道)前통일원장관.이학봉( 李鶴捧)前민정수석등이었다.
결국 89년 1월12일 李씨가 직권남용죄로 구속됐고,이어 보름뒤인 27일 張씨마저 구속됐다.全前대통령이 특히 가슴아파했던사람은 「분신」으로 불리던 張씨의 구속이었다.
張씨는 처음에 사법처리 대상이라는 얘기가 나돌자 먼저 과거 부하이던 박철언(朴哲彦)청와대정책보좌관에게 이를 확인했다(朴보좌관은 장세동 안기부장시절의 특별보좌관이었다).처음에는『걱정말라』는 대답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답이 불명확 해졌다.나중에는『불가피하다』는 통보가 왔다.
***사위가 통신수단 張씨는 급히 편지를 써 全前대통령의 사위 윤상현(尹相炫)씨에게 주면서 백담사를 한번 다녀와 달라고 부탁했다.尹씨는 거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던데다 건장한 체격이라 젊은 경호원으로 가장,남의 눈에 띄지 않고 백담사를 오갈수있었기에 메신저역을 주로 맡았다.尹씨는 밤을 달려 새벽2시 백담사에 도착해 편지를 전했다.편지를 본 全前대통령은 그자리에서만년필을 꺼내 「사랑하는 세동아.모든게 내탓이다….그러니 세동아,얘기해라.네가 원하는대로 내가 다 하겠다…」는 내용 의 답장을 썼다.다시말해 「노태우를 후계로 삼아 오늘의 수모를 초래한 것은 모두 내 책임이니 말만 하면 무슨 일이든 너를 위해 다 하겠다」는 식의 비장한 부하사랑을 담은 내용이었다고 한다.
張씨는 답장을 받은 얼마뒤 묵묵히 구속됐다.아무런 폭탄선언도없었다. 그런데 許씨는 구속되지 않았다.5共 관계자 X씨에 따르면 매우 호전적(?)인 강경파 許씨는 6共을 협박하는 적극적인 공세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X씨는 『許씨는 盧대통령과 직접 채널이 통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노태우대통령과 직접관련된 폭탄선언을 하겠다」는 등 공갈을 했죠.놀란 6共쪽에서 全前대통령에게 사람을 보내 「許씨를 좀 달래달라」고 부탁해온 적도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실제로 許씨는 언론청문회에 나와 증언하던중 『언론통폐합의 문제는 과정상의( 보안사에 의한)강제성』이라며 『청문회석상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나면 할 말이 많다』고 발언,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盧대통령을 겨냥한 위협사격을하기도 했었다.
측근의 구속에 더욱 황량해진 백담사의 全前대통령이 보다 적극적인 위기대응전략으로 택한 것은 「백일기도」였다.「국태민안(國泰民安)과 영가천도(靈駕薦度.영혼들을 위로함)」라는 제목에서 보이듯 매일 하는 불공에서 정치적 명분도 얻고,스 스로의 마음도 가라앉히는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채식病 생기기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백일기도중에는육식을 못하는 바람에 50일쯤에는 메스꺼움과 빈혈증을 동반한 채식병(비윗병)이 생기기도 했다.全前대통령부부는 공식적으로 『70일쯤 지나니 육체적.정신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고 했지만 내심은 그렇게 편하지 못했다.
다음해 4월 여권 고위인사로는 처음 백담사를 찾았던 채문식(蔡汶植)前민정당대표의 기억을 들어보자.여권인사들이 백담사行을 꺼리던 시절,이미 6共에 대한 미련을 떨친 蔡의원이기에 별 거리낌없이 백담사를 찾은 것이다.
용대리 매표소 입구에서 경비중이던 경찰이 蔡의원을 막고는 『미리 연락했느냐』등등을 캐물은뒤 한참뒤 『그냥 전화만 하고 가라』는 등 한사코 출입을 막으려했다.蔡의원이 『명색이 내가 당대표에 국회의장까지 지낸 사람이다.여기까지 와 그 냥 가란 말이냐』며 호통을 치고서야 출입이 허용됐다.
全前대통령이 반갑게 맞아주었다.『백일기도중이라 멸치 대가리 하나 안들어간 찬이지만 점심을 먹고가라』며 붙잡았다.全前대통령은 이날 『절하다 보면 추워 무릎이 시리다』면서도 『그래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찬물에 세수한다』고 말했다.그는 이같은 결심배경에 대해 『주위에서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오죽 못나 여기까지 왔나」「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그것(새벽예불)도 못하나」라는 소리할까봐 오기로 버티고 있다』며 「대통령의 자존심」을강조했다.
이 정도는 점잖은 표현이었다.보다 솔직한 심경은 이무렵 全前대통령이 측근들에게 토로하곤했던 『아마 박정희(朴正熙)대통령 같았으면 이 수모와 울분을 참지 못해 자살했을 것』이라는 말일것이다. 마침내 그의 심경은 백일기도가 끝난 5월16일 회향(回向)법회에서 「손볼 놈」이라는 발언으로 피력됐다.『손볼 놈이몇 있었는데 백일기도를 하면서 「모두가 내 탓」이라고 마음을 달랬다』라는 요지로 백일기도후의 열반묘심(涅槃妙心.모든 고뇌를잊고 편안해진 마음의 경지)을 강조하느라 한 말이었다.그러나 세간에는 「손볼 놈」이라는 절치부심(切齒腐心.억울함에 이를 갈며 속을 썩임)만 부각돼 알려졌다.
사실 6共정부의 약속위반으로 국회증언이 불가피해져가던 당시,자신을 둘러싼 정국 악화를 지켜보는 그의 본심은 결코 묘심(妙心)일수만은 없었을 것이었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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