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세대 대반격 … 진보 쪽 자원 고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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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하경 문화·스포츠 에디터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한 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자가 됐다. 각종 도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이 당선자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확고했다. 50% 가까운 지지에 담긴 국민들의 바람은 무엇일까. 진보 좌파 성향 정권의 집권 10년에서 보수 우파 정권으로의 권력 이동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중도 진보 성향의 임혁백(좋은정책포럼 공동대표.고려대 정외과) 교수와 중도 보수 성향의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19일 본지 이하경 문화.스포츠 부문 에디터의 사회로 이번 대선의 의미를 짚어보았다.

사회=이명박 후보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가장 많은 표 차로 당선됐다. 압도적인 승리의 의미가 커 보인다.

임혁백(이하 임)=이명박 정부는 정당성을 확보하게 됐다. 이런 압도적 지지는 이 후보가 앞으로 마주칠 BBK 특검 문제 등을 막아내는 방패 역할을 할 것이다.

송호근(이하 송)=의미 있는 득표율이다. 하지만 이명박 후보가 유권자들로부터 단단하게 지지를 받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권자들이 노무현 정부로부터 겪은 쓰라린 상처의 경험을 호소하는 차원이 강하다. 당선자로서는 기분 나쁘겠지만 호소의 차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국민들이 그만큼 고달팠다는 것이다. 또 이회창 후보가 쐐기를 박음으로써 투표 유동성을 줄였다. 신당과 한나라당의 표 차가 크게 나타난 점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회=이번 선거를 관통하는 특징과 의미부터 짚어보자.

임=이번 선거의 가장 큰 의미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판이 아닐까 한다. 노무현 정권의 실책에 대한 회고적 투표(retrospective voting)가 주를 이뤘다. 이명박 후보의 인물 검증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또 하나의 특징은 경제 살리기라는 보수적 프레임(틀) 안에서 선거전이 진행되다 보니 경제는 이명박 후보가 제일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확산됐다. 서울시장 때 버스전용차로 도입, 청계천 복원이라든가 또 현대건설을 경영했던 최고경영자(CEO)의 면모가 장점으로 작용하니까 네거티브가 안 먹혀든 것이다. 건설회사 사장 출신에게 국민들이 거는 도덕성의 기대 수준은 낮았다. 아마 이회창 후보에게 이명박 후보 같은 흠이 드러났으면 벌써 물러났을 것이다.

송=탈3김 시대의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간다는 느낌이다. 탈3김 시대 이후 정치인 빈곤 현상이 극대화돼서, 대통령제가 과연 한국에 맞느냐 안 맞느냐는 논란까지 불러일으킨 선거였다. 정치 인재 빈곤 현상은 앞으로 더 심해지지 않을까 싶다. 20~30대의 지지에 의해 탄생한 노무현 정권에 대한 50~60대 기성세대 혹은 유신세대의 반격과 도전이 성공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일종의 정체성 전쟁의 성격이 있고, 그 속에 세대 전쟁이라는 요소도 숨어 있어서, 압도적인 승리이기는 하지만 '불안한 영광'인 것 같다. 비유하자면 여행은 시작했는데 길은 보이지 않는다고나 할까.

임=나는 달리 생각한다. 세대 간 대결 구조가 사실 실종됐다. 2002년에는 촛불시위라든가 월드컵, 여중생 사건, 반미 이런 것들이 2030세대를 격분시키고 인터넷으로 확산되며 노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번에는 이런 것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세대와 상관없이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것 같다. 2002년 노 대통령을 뽑은 젊은 세대는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을 해결 못한 노 정권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론 UCC 같은 새로운 인터넷 도구를 선거에 활용 못하도록 엄격하게 규제한 것도 2030세대가 움직이는 데 한계로 작용했다. 이런 가운데 정책 선거는 실종됐다. BBK로 시작해 BBK로 끝났다. 이명박 후보의 진짜 아킬레스건은 정책에 있는데, 정책 검증을 할 시간을 놓쳐버렸다. 대운하 건설과 미국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 불발 같은 외교력 문제 등을 따져볼 만했는데 다 묻혀버렸다. 이러다 보니 상당히 재미없는 선거로 끝나버렸고 투표율이 낮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본다.

송=유권자들의 관심은 정책보다도 한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정체성)로 이동했던 것 같다. 한국 현대사를 수놓았던 공통의 경험이 이번 선거에 중요하게 작용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80년대 세대의 경험을 공유했다면, 이명박 당선자는 70년대 세대의 경험을 공유한다. 즉 자수성가, 성장에 대한 기억, 공동체적인 향수 등의 기억이 이번 선거를 이끈 것이다. 70년대 세대 가치관의 확산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지난 10년간 집권해 온 이른바 진보정권이 보수정권으로 교체됐다. 좌파에서 우파 정권으로의 권력 이동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임=보수정권으로 가긴 갔지만 보다 복합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나는 이번 선거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명박 후보는 실용주의적 보수를 표방했다. '실용 정부'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국에서 진보.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서구와 달리 친북이냐 반북이냐로도 구분된다. 이명박 당선자는 대북정책에서도 상당히 실용주의적으로 갈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단순히 보수로의 이동이라고만 볼 수 없다. 햇볕정책이 퍼주기라며 전면 철폐하지는 않을 것이다.

송=일단은 우파 쪽으로 권력이 갔다고 했을 때, 문제는 일반 유권자들은 민주화 이후 상당히 진보 쪽으로 이동했는데 새로 들어설 정권은 보수 쪽으로 가는 부정합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권이 풀어야 할 숙제다. 노무현 정권은 진보의 유용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진보정치의 실험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숙제는 유권자들의 진보 좌파적 요구를 얼마나 잘 수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파 실용주의'라고 하는데 아마 유럽 정치에 있어서 우파의 행보를 벤치마킹하면 이명박 정부가 갈 길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사회=흥미로운 지적이다. 5년은 긴 시간인데, 이런 부정합의 상태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송=경제와 성장은 보수주의자들의 무기다. 어떤 성장이냐를 놓고 개인의 성장과 전체의 성장으로 나눠볼 때, 70년대의 성장은 개인 성장의 성격이 컸다. 진보적 가치관은 전체의 성장을 중시하며 이명박 정권의 실용주의에 공세를 가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인들은 성장률에 대한 열망이 크기 때문에 5% 수준에 머물거나 그 이하로 떨어지면 경제 성장을 주요한 정치적 정당성으로 제시한 이명박 정권은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고, 가장 큰 결함인 도덕성에 대한 결핍도 다시 공격받을 수 있다. 이명박 후보는 자신의 정당성 자원을 경제성장이라는 자원으로부터 두세 가지로 분산시키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끌고가야 한다. 6개월에서 1년 안에 판가름날 듯하다.

임=국민들 하나하나 따져보면 중도의 폭이 넓다. 진보와 보수 30%씩이고 나머지는 중도다. 그런데 왜 중도진보 정당이라는 신당이 참패했는가. 그나마 있었던 정책 토론조차 성장률 경쟁뿐이었기 때문이다. 신당은 보수의 프레임에 갇힌 것이다. 신당이 4개월 뒤 총선에서도 계속 이런 프레임으로 선거를 치르면 백전백패다. 자기의 프레임을 만들어 대결해야 한다. 성장률 몇%를 걸고 경쟁하는 것은 후진국적이다. OECD 가입국 중 그런 나라는 없다.

송=진보 쪽에 프레임이 없었다기보다 만들 자원이 고갈됐던 것 같다. 그게 안 되니까 네거티브가 등장한 것이다. 지적해야 할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프로젝트를 말한 후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사회=유권자의 표심을 보면 한 후보가 우뚝 서고 나머지 후보에게 골고루 표가 분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같은 민심의 선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송=이명박, 이회창 표를 합쳐 보수가 60% 이상 나왔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 전체가 보수로 이동했다고 볼 수는 없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서서히 진보로 이동했다. 중도층은 언제든지 진보 혹은 보수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문국현 후보의 선전도 의미가 크다. 노 정권의 지지기반인 젊은 세대의 표를 문 후보가 다 가져간 것이다.

임=마지막 변수였던 BBK동영상의 가장 큰 피해자가 이회창 후보였다. 이회창 후보를 찍으려던 사람들이 안 되겠다고 결집해서 이명박 후보를 찍은 것 같다. 문국현 후보의 선전이 정동영 후보의 표를 가져갔을 것이고, 민노당은 상당한 위기에 직면했다. 민노당은 남북 문제에 치중하느라 풀뿌리정치, 생활정치적 이슈를 못 펼친 것이 문제다.

사회=2002년 대선과 확연히 달라진 특징은 진보적 시민단체의 활동이 조용했다는 점이다.

임=가장 격렬한 선거전이 벌어지던 캠퍼스마저 조용했다. 진보적인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줄어든 반면, 뉴라이트라 하는 보수적인 시민사회들은 상대적으로 정책 토론을 활발히 해온 것 같다. 오히려 역전된 것 같다.

송=참여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민단체가 과잉 참여했다. 주요 시민단체가 준기관화한 것이다. 시민단체의 본령은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이명박 정부가 주시해야 할 대목이다. 지난 5년간 잠자던 보수진영의 시민단체가 많이 조직화됐는데, 이들이 이명박 정부에 노 정권에서와 같은 기회를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사회=선거 과정에 만족스럽지 않은 점이 있더라도 수평적,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점은 의미 있는 진전이 아닌가 싶다.

임=미국의 정치학자 헌팅턴은 민주주의 공고화를 측정하는 지표로 '두번의 전환(two urnover)'을 얘기한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 때 한 번,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투표를 통해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전환을 이룩했다.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 두 번째 전환이며, 민주주의의 발전 혹은 완결로 볼 수 있다.

사회=새 대통령이 해야 할 과제를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임=모든 국가경영을 기업경영하듯 하면 안 된다. 국가는 공적인 존재고 기업은 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사적인 이윤을 중요시하고, 국가는 공익을 중요시한다. 국가는 이윤이 남지 않더라도 가난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 이게 공익이다. 모든 것을 공론에 따라 일해야 하고 항상 국민과 소통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송=이명박 후보의 경제 살리기가 국민들에 어필했다. 수도권에서 특히 그런 것 같다. 포스트 민주화.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명박 당선자는 실용주의의 핵심적인 가치관이 뭔지 환기해야 한다. 적응성.유연성이 중요하다. 유럽의 정당은 진보정당이 정책을 제기하고 보수정당이 이를 받아서 실행하는 경우가 많다. 후보 시절 공약한 것을 꼭 지키려 하다가 실정을 하고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당선된 순간 공약은 다 잊어버리라는 이야기를 기억했으면 한다.

사회=민주화 시대를 의미하는 87년 체제가 존재했고, 97년 체제가 있었다. 2008년 체제의 과제는 무엇인가.

임=산업화에 이은 87년 체제는 민주화 시대이고, 97년 체제는 세계화 시대다. 세계화 시대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노무현 정권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비정규직.청년실업 등 세계화 시대의 문제 해결에 매달려야 했는데, 과거 민주화 시대의 문제에 중점을 둔 것 같다.

송=지난 20년은 산업화의 성숙 단계이자 초기 민주화의 단계와 겹쳐 있는 단계였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성숙이 겹친 것이다. 2008년부터는 이제 본격적으로 세계화 시대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신산업의 시대와 민주주의를 성숙시켜 나가는 시대가 겹쳐진다고 생각한다. 신산업을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결합 과제가 새 정권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1956년생. 89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 서울대 대외협력본부장. 저서로 '열린시장 닫힌 정치''전환의 정치, 전환의 한국사회''다시 광장에서' 등이 있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1952년생. 89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노무현 당선자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치개혁연구실장을 지냈다. 저서로 '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새천년의 한국정치와 행정' 등이 있다.

정리=배영대.이에스더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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