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흐의 길 (네덜란드 시기 1881~1885년) ①

중앙일보

입력

빈센트 반 고흐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다. 거장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긴 하지만 그를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고흐도 마찬가지다. 워크홀릭에서는 ‘길 위에 선’ 고흐를 조망해보기로 했다. 고흐에게도 그만의 산책로와 길이 있었으나, 고흐와 함께 그 길을 걸을 수 없는 우리는 그저 뒤따를 뿐이다. 혹은 뒤따라 읽거나 관람할 뿐이다.

아우 테오야, 나는 네가 산책을 지금보다 더 자주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란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1874년 1월

자신의 동생이자 예술적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편지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 고흐는 산책을 사랑했다. 아니 사랑해야 했다. 그것은 자연 안에서 무엇이든 얻어내야 했던 가난한 화가로서의 운명이자 굴레였다. 그러나 1874년, 스물 한 살의 고흐는 그때까지도 자신의 가혹한 미래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다른 유명한 화가들과 달리 고흐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숙부 세 사람 모두 화상(畵商)인 덕분에 16세부터 유명한 미술품 가게에서 점원 노릇을 했을 따름이었다. 인류의 미술사에 길이 남을 고흐의 혼란과 우울은 스무 살이 되던 해 흠모하던 여성(제니 로이어)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 시점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그에게는 신념이 있었다. 자연의 힘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고흐의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우울이 깃든 것은 25살이 되던 해 7월이었다. 구혼을 거절 당한 이후 종교에 몰입하게 된 고흐는 직장에서 해고되어 전도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탄광촌으로 터를 옮겼다. 하지만 고흐는 완고한 성격과 광적인 신앙심, 가난한 자들을 향한 지나친 연민으로 인해 다른 종교인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위치에 처하게 된 고흐는 26살 여름,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했다. 테오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은 뒤의 일이다. 잘 알려져 있듯 초반에 이들의 우애는 아주 두터웠다.

너와 함께 산책을 하니 예전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삶은 좋은 것이고 소중히 여겨야 할 값진 것이라는 느낌말이다. 근래 내 생활이 궁색해지면서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너와 함께 걸은 덕분에 건강한 기운을 되찾았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타인과 더불어 부대끼며 사랑을 느끼는 때 인 듯하다. 1879년 10월 15일

그러나 가난이란, 사람을 순식간에 초라하게 만들어버리는 마력을 지녔다. 고흐는 갈수록 볼품없어지는 자신의 외모와 사람들의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말끔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돈을 벌 것인가 아니면 멸시 당하는 삶을 감내하며 화가의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고민 끝에 그는 후자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광산으로 날마다 산책을 다니며 스케치 공부에 전념했다. 가난은 예상보다 더 혹독했고 형제간의 다정했던 우정에 서서히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흐는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을 무릅쓰고 항상 테오를 설득했고 자신의 처지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림 공부를 이어나가야 했다. 28살이 되던 해 고흐는 사촌(케이)에게 또 한 번 구혼을 하고 운명의 수순을 밟듯 또 거절을 당한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그림 스승(모베)이 있는 헤이그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고흐는 줄곧 해안과 숲을 산책하며 자연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본격적으로 예술성을 키우기 시작했다.

예술가는 초기엔 자연의 저항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가 자연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자연과 대립하는 대신에 차라리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자연에 정직한 데생화가는 하나다. 자연은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린 자연을 움켜쥐어야 하며 그것도 두 손으로 힘껏 붙잡아야 한다. 나는 요즘 인물데생에 열심인데 그것은 풍경데생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 산책길에서 버드나무를 만난다면 인물데생을 하듯 그릴 생각이다. 그 나무가 살아 숨 쉬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노력할 것이다. 1881년 10월

고흐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만 팔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유화에만 국한된 이야기다. 그는 숙부의 주문을 받고 자신의 산책 풍경을 열두 장 스케치해서 20길더에 팔았다. 이 시절 헤이그의 풍경은 고흐에게 가장 큰 재산이었다. 그는 자주 바다와 숲을 마주 했으며 특히 감자밭을 산책할 때면 진지한 작품을 염두에 두고 매우 세심하게 관찰을 하며 돌아다녔다. 열정적으로 습작한 결과 스케치에 자신감이 생긴 고흐는 모델을 구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에게 겨우 지원받아 생활하는 처지에 모델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는 빈민가 무료식당이나 열차 대합실 같은 곳에 가서 스케치를 하곤 했다. 하지만 모델을 구해야한다는 신념과 갈증이 그를 점점 더 예민하게 만들었고 고삐 풀린 발길은 날이 갈수록 더 가난하고 비참한 곳으로 편중되었다.

그림에 대한 고민과 근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다. 여기에 다른 근심까지 겹치고 모델비 마저 구할 수 없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네게 이 모든 비용을 부담해달라는 것은 너무 미안하지만 난 지금 성공의 기운을 느낀다. 붓에 더 힘을 갖게 되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그릴 거다. 우리가 열정을 잃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네가 더 이상 돈을 보내줄 필요가 없게 될 날이 올 거다 분명히. 1882년 2월.

그러던 어느 날, 임신한 채 버려진 창녀 ‘시엔’이 고흐에게 발견되었다. 고흐의 멘토였던 모베는 이 불결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 그를 떠나고 만다. 하지만 고흐는 이 갈 곳 없는 여성(시엔)을 돌봐주며 데생공부에 진전을 보인다. 가족들의 냉대 속에서도 시엔과 함께 미래를 꿈꿀 정도로 그녀를 향한 고흐의 애정은 남달랐다. 하지만 한 여자와 평범한 미래를 꿈꾸기엔 그의 혼이 너무 먼 곳까지 가버렸던 것일까. 시엔을 돌보며 데생공부를 하는 순간에도 사실 고흐의 머릿속엔 다시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야외로 나가야 한다. 예술은 질투가 심하다. 나는 이제부터 예술의 비위를 맞출 셈이다. 조만간 흡족할 만한 그림을 보여줄 것이라 확신한다. 목표를 이루는 건 지독하게 힘들겠지만 나는 반드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슬픔은 그 작은 시작이다. <메르더보르트 거리><레이스웨이크의 목초지><건초창고> 같은 풍경화가 그것에 해당한다. 그 그림 안에는 내 심장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슬픔이 묻어있다. 나는 풍경화나 다른 그림을 통해서 뿌리 깊은 고뇌를 표현하고 싶다. 이미 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돼 있다. 화가의 의무는 자연에 몰두하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작품 속에 쏟는 것이다. 그래야 타인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된다. 단지 팔기 위한 그림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나는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며 진지하게 작업에 임할 것이다. 1882년 7월

고흐를 감동시키는 것은 자연 안에 다 들어있었다. 그는 황야와 소나무를 보며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는 가난한 여인과 모래를 나르는 가난한 농부 그리고 그들과 대비되는 웅대한 바다 특히 스헤베닝겐의 해안을 유화로 그리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노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더 깊은 고통의 전주곡이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고흐가 유화의 자유로움에 눈을 뜬 것은 고흐 형제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의 가난은 더 냉정하게 그의 영혼을 할퀴었고 점점 더 비굴해지는 편지를 받아 읽는 테오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하지만 고흐의 열정은 잔인했다. 날마다 새롭고 의미심장한 풍경이 그의 눈과 가슴에 달콤하게 안겨졌다. 예술중독에 빠진 것이다.

내 건강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다. 그저 툭 트인 야외로 나가서 그림을 그리면 저절로 나을 병이다.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 피곤할 때조차 더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퓌거리의 복권가게를 기억하니? 그 앞에 무리지어 서서 기대에 찬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스케치했다. 복권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이 우리 눈에는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얼마 안 되는 푼돈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그 불쌍한 사람들의 고통과 쓸쓸함을 상상해보렴. 나는 그러한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다. 1882년 9월~ 10월 1일

건강이 악화된 고흐는 전처럼 마음껏 쏘다닐 수 없게 됐다. 그럴 때면 그는 작업실의 창을 활짝 열고 지칠 줄 모르는 강렬한 시선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을 실컷 산책했다. 테오는 형을 위해 파리의 풍경을 자주 묘사해주었고 고흐는 기력이 회복될 때마다 다른 화가들과 거리를 산책했다. 그러나 여전히 타인과 어울리는 것이 서투른 그였다.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산책하는 것은 별로 즐겁지 않다. 그들은 가난하고 지저분한 사람들을 헐뜯는다. 가장 진지하고 아름다운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셈이지.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경심도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특정 유파에 소속되고 싶지 않다. 그저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을 뿐이다. 1883년 8월

고흐는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들에게 점점 더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자신이 극도로 날카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고 그러한 사태를 감수하고서라도 화가의 길을 걸으리라 테오에게 늘 다짐하며 강조했다. 삶이 아무리 초라하고 허망해도 확신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며 진실 된 농촌그림을 그리고 말리라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결국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려냈다.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그림을 보며 감탄하고 좋은 작품이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람의 생을 관찰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했다. 그 노동의 손은 정직한 식사를 암시한다. 나는 이들과 함께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전 시대 그림의 등장인물이 결코 하지 않은 것, 그건 바로 노동이다. 난 그 노동의 진실 속으로 더 가깝게 걸어들어 갈 것이다. 나는 작업실 안에서 앉은 채 그려진 그림들을 비난한다. 모든 훌륭한 그림들은 더 진실한 이야기를 찾아서 야외로 나가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1885년.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