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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추락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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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중국 청 왕조의 강희·옹정·건륭제는 황금시대를 낳은 3대(代) 명군이었다. 특히 옹정제는 10여 명의 형제와 치열한 암투 끝에 왕위를 쟁취한 탓인지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란 특이한 후계자 지명 방식을 만들었다. 자금성 건청궁에 걸린 ‘정대광명(正大光明)’ 현판 뒤에 후계자 이름을 적은 밀지를 남겨 사후에 공개토록 한 것이다. 경쟁을 거쳐 가장 뛰어난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는 비책이었다. 그 덕에 건륭 시대의 화려한 문화가 탄생했다.

 1970∼80년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원로들의 동의를 얻어 장쩌민을 발탁한 데 이어 차차기 후계자로 후진타오를 키웠다. 한 세대 앞을 내다본 포석이었다. 반면 마오쩌둥은 후계자였던 류사오치·린뱌오를 피바람 속에 제거했으나 결말은 화궈펑이라는 실패작으로 귀착됐다.

 러시아에서도 후계자 정치는 꽃을 피우고 있다. 55세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3기 연임 금지 조항에 걸리자 내년 3월 대선의 집권당 후보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42세) 제1부총리를 지명했다. KGB 출신의 푸틴을 발탁한 것은 보리스 옐친이었다. 푸틴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KGB의 후신) 국장, 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벼락 출세 코스를 밟았다. 그럼에도 그가 ‘강한 러시아’의 초석을 다진 걸출한 리더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어 뵌다. 옐친-푸틴-메드베데프 후계 체제는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퇴임 전 훌륭한 후계자를 키우는 일은 각국 지도자들의 또 다른 경쟁 분야다. 선거정치가 만개한 미국에서도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대통령은 훗날 성적표를 받을 때 감점을 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권력의 생리는 냉혹하다. 후계자가 전임자를 밟고 가는 일이 무수하다. 가깝게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관계가 그랬다.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도 불운한 편이다. 그는 외환위기 당시 자신에게 반기를 든 후계자를 잘라내곤 4년 전 압둘라 바다위 총리에게 권력을 넘겨줬다. 하지만 마하티르는 요즘 압둘라를 겨냥해 “내 등에 칼을 꽂고 있다. 나는 사람을 잘못 고르는 습관이 있다”는 독설을 퍼붓고 있다.

 17대 대선을 앞두고 시중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한 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고 있다. “노 대통령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지지 선언을 하면 이 후보의 독주에 제동이 걸린다”는 내용이다. 제2의 노무현이란 이미지 자체가 치명적이라는 얘기다. 한국은 참 고약스러운 후계자 추락 시대다.

이양수 정치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