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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쇼가 평화를 주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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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부시 대통령이 왜 갑자기 친서를 보냈을까. 지지부진한 2·13 합의 이행의 돌파구를 열려는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북한 핵 프로그램 신고가 연말 시한을 넘기는 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렇게 된 배경의 하나는 미국의 의지가 북한에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은 핵 문제 해결 이전에 4자 종전선언을 추진하겠다고 김 위원장에게 제의해 놓았다.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그런 잘못된 기대가 김 위원장의 발걸음을 붙잡지 않도록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또 핵실험 전인 2005년 9월 6자회담의 합의를 상기시켰다. 북한의 핵 폐기(dismantle)와 북한에 대한 주권 존중 및 불가침 원칙이다. 종전선언이 더 필요 없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을 압축해 보여 주는 것이 9월 7일 시드니 한·미 정상 공동 기자회견이다.

“종전선언 등에 대한 말씀을 빠뜨리신 것 같다.”(노 대통령) “김정일에게 달렸다.”(부시 대통령) “김정일 위원장이나 한국 국민은 그 다음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노 대통령) “더 이상 명확하게 얘기할 수 없다.”(부시 대통령)

정상 외교에서는 보기 힘든 무례다. 화가 나 노려보는 부시 대통령의 표정을 보고 백악관 참모들은 속으로 “아이고 맙소사(Oh my God)”를 외쳤다고 넬슨 리포트는 기록했다.

왜 이런 해프닝이 생겼을까. 논란의 발단은 지난해 11월 하노이 한·미 정상회담이다. 노 대통령의 설명대로 이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이 먼저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다만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전달할 때 흥정을 붙이는 거간꾼처럼 중요한 거래 조건을 빼 버렸다. 바로 핵이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만 포기하면 많은 걸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여기 이렇게 김정일과 같이 앉아 종전선언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게 한 고위 외교관의 설명이다. 10월 초 남북 정상회담에서 ‘3자 또는 4자’라는 표현의 혼란이 생긴 것도 부시 대통령의 그런 의도하지 않은 표현 때문이란 것이다.

10월 4일 평양에서 돌아오던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제의한 종전선언을 설명했더니 김 위원장이 “남측이 성사시키기 위해 한 번 노력해 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물론 ‘핵을 포기하면’이란 조건이 빠진 종전선언이다. 노 대통령은 그 조건을 들고 계속 미국을 재촉했다. 남북 정상회담 직후 윤병세 외교안보수석을, 지난달 7일에는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을 워싱턴으로 보내 라이스 국무장관을 설득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임기 중 종전선언은 거절당했다.

며칠 뒤인 13일 노 대통령은 “한쪽은 ‘선 평화체제, 후 핵폐기’를, 다른 한쪽은 ‘선 핵 폐기 후 평화체제’를 주장해 왔지만 이렇게 해선 문제를 풀기 어렵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이달 초엔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과 박선원 청와대 안보전략비서관이 또 미국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라이스 장관의 대답은 꼭 같았다. 더 이상 혼선을 피하면서 종전선언 논란을 중단시키는 노력이 이번 친서인 셈이다.

북한 핵 폐기는 이제 시작이다. 북한은 이미 만들어진 핵무기는 신고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몇 개를 만들었는지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없다고 주장한다. 밀수입한 알루미늄관은 미사일 제조용이라며 신고 대상에서 뺐다. 그 뒤에도 폐연료봉 반출, 핵무기 폐기, 우라늄 농축용 시설·장비 폐기 등 무수히 많은 고비가 남았다. 미국은 핵 물질과 기술의 대외 이전까지 밝히라고 요구한다.

평화협정에는 종전선언 외에도 평화선언, 영토 규정, 국교 정상화가 들어가야 한다. 부시 대통령이 이번 친서에서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평화협정과 수교까지 갈 수 있다고 재확인했다. 그런데 굳이 핵을 포기하기 전에 종전선언부터 하려는 이유가 뭘까. 주둔 명분이 약해진 유엔군과 미군 주둔이 시빗거리가 되면 북핵 문제는 가려지고 해결이 더 미뤄질 수밖에 없다. 급한 건 임기에 쫓기는 이 정권뿐이다. 정치 쇼에 매달려 이런 실질적 문제의 진전을 오히려 가로막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김진국 국제담당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