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되살리자>2.수난의 남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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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태조(李太祖)가 왕위에 오른지 3년째인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궁궐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어 이름지어진 남산은 단순히 서울 한복판에 솟은 산이 아니라 국사당(國師堂:봄.
가을에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 위치했던 민족 의 정기가 깃들인 성지다.
서울정도(定都)6백년동안 우리민족과 애환을 함께 했던 남산은근대로 접어들면서 외세에 의해 할퀴어지고 권력과 돈에 의해 마구 파헤쳐졌다.남산의 수난은 민족의 수난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남산의 수난사는 임진왜란때 한양을 점령한 왜군이 남산에 주둔지를 만들고 왜성(倭城)을 쌓으며 시작됐다.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3백2년만인 1894년에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구실로 조선에 파견된 일본군은 또다시 남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왕궁을 향해 포대(砲臺)를 설치하는등 남산을 훼손시켰다.
더구나 한일합방(1910년)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남산 기슭에 녹천정(綠泉亭)이란 이름의 정자를 만들어 놓고 조선침탈의 흉계를 꾸몄고 일본인 대부분이 회현.남산.장충동등 남산 기슭을 주거지역으로 삼아 녹지를 훼손시켰 다.
26년에는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을 헐고 경성신사(京城神社)와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어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민족정기의말살을 기도했다.
보다 본격적으로 남산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이후.전쟁이후 혼란한 사회상을 틈타 행정권이 남용되면서 공원계획용지로 보호를 받던 남산에 학교가 들어서는가 하면 외인주택.군부대.공공기관등이 건립됐던 것이다.
해방이 돼 동본원사.박문사등 남산에 있던 일제의 사찰은 철거됐으나 경성신사 부지 일대가 56년 숭의학원 부지로 결정돼 공원용지에서 해제됐다.
또 57년에는 이태원산1일대가 외국인주택단지를 만든다는 이유로 공원용지에서 해제됐으며 63년에는 용산동산2일대도 월남피난민 주택지로 불하돼 공원에서 깎여 나갔다.
62년에는 타워호텔및 자유센터 건립을 위해,63년엔 중앙공무원교육원 부지로,65년에는 동국대 부지로 잠식되고 말았다.
50~70년대에는 보광동수원지,군부대인 수방사,안기부까지 산기슭에 들어서는등 많은 공공시설물들이 남산을 에워싼채 시민들로부터 남산을 빼앗아 갔다.
70년대이후 대표적인 남산훼손사례는 주공외인아파트와 남산맨션아파트 건립.16층 이상 고층인 이들 아파트는 남쪽 능선을 뭉개고 앉아 남산의 경관을 망가뜨려왔다.
때문에 많은 시민들은 서울시가 정도 6백년을 맞아「남산 제모습 찾기」사업의 하이라이트로 남산 훼손의 상징물인 외인아파트를철거하고 수방사 이전부지등에 대규모 공원등을 조성하는 사업을 전개하는 것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잘하는 일이라 며 환영하고 있다. 그러나 남산의 보존을 위해서는 대기오염으로 병들어가는 생태계보호,남산주변 건물에 대한 엄격한 고도제한등 아직도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李哲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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