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up] 재경부 서기관 한승우씨의 증권사 현장 체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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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갑’과 ‘을’이다. 강자는 갑, 약자는 을이다. 재정경제부 공무원은 당연히 갑의 위치다. 과천에서 한마디 하면 아무래도 금융회사는 움찔하게 된다.

그런 갑의 자리를 포기하고 을을 자청한 이가 있다. 민간 근무 휴직제를 이용해 신영증권에 파견 나온 재경부 정책조정국 한승우(39·사진) 서기관이다. 그는 지난해 6월 신영증권 투자금융(IB)부서 부장으로 나왔다. 증권사에 파견 나온 공무원은 그가 처음이다. ‘우아하게’ 책상에 앉아 경제(GDP)·물가 등을 다루다가 지금은 인수합병(M&A) 거래 하나에 피가 마른다. 전체 파견 기간(3년)의 절반을 지난 그에게 물었다.

-공무원 때와 많이 다르겠다.

“예전에는 거창하게 국민의 만족 극대화가 목표였다. 이곳에선 더 많은 이익이 최고다. 업무 과제도 판이하다. 재경부에선 좋게 말하면 큰 그림을 그리고, 나쁘게 말하면 뜬구름 잡는 얘기만 했다. 여기서는 ‘이 딜(거래)을 따면 10억원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분명하다. 술집까지 따라다니며 매달린 딜을 경쟁사에 뺏겼을 땐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나와서 배운 점은.

“내가 무슨 정책을 만들어도 시장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몰랐다. 지금은 담당 공무원이 기침만 해도 시장 반응을 속속들이 안다. 개인적으로는 월급날 아내에게 큰소리 칠 수 있다. ”

-재경부로 복귀하면 뭐가 달라질까.
 
“전에는 각종 협회를 통해 시장동향을 알아보느라 2∼3일이 걸렸다. 지금은 ‘형님들’께 전화 몇 통화만 하면 금방 분위기가 파악된다. 펄떡펄떡 살아 있는 정책을 만들고 싶다.”

-재경부 승진에는 불리하겠다.

“좀 늦을 뿐이지 과장 직함은 못 달겠나. 지금 아니면 실무 못 해본다. 눈으로 보기만 하자고 여기 온 거 아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나.

“IB 업무를 한다. 인수합병(M&A), 부동산 금융(PF), 전환사채(CB) 발행이 핵심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본질은 영업이다. 무조건 딜을 따내야 한다.”

-‘을’ 위치로 강등된 느낌은.

“기업체에 파견을 가도 보통 기획·관리 부서로 간다. 나는 영업부서로 왔다. 사실 을도 아니고 ‘병 정 무’ 쯤 되는 것 같다(웃음).”

-재경부 공무원이라고 하면 영업에 도움이 될 것 같다.<※그의 명함엔 신영증권 부장과 ‘재경부(민간휴직)’가 병기돼 있다>

“거래하는 저쪽이야 내가 어디서 왔건 상관없는 이들이다. 다만 워낙 이 바닥 생리가 변화무쌍해 ‘공무원이라니까 적어도 사기는 안 치겠구나’하고 믿어준다. 혹시나 오해 살까 봐 되도록 재경부 선후배들에겐 연락을 안 한다.”

-나와 보니 뭐가 힘든가.

“처음 한 달간은 밥 먹을 사람도 없었다. 공무원은 시키는 일만 했지만, IB는 누가 일을 주지 않는다. 처음엔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알아서 찾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막막했다.”

-어떻게 극복했나.

“정말 열심히 사람을 만났다. 지난 1년 반 동안, 공무원 10년간 만난 사람보다 10배 이상 더 만났다. 어르신들 사귀려고 야한 농담도 외우고 다녔다.”

-‘낙하산’이라고 직원들의 불만은 없나.

“지금 내 별명이 ‘한바라’다. 왜 증권가에 ‘마바라(증권사 객장에 상주하면서 뇌동 매매를 일삼는 소액 투자자)’라는 비속어가 있지 않나. 나는 여기저기에 내가 잘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가만 있으면 누가 알아주나. 영업인데. 영업은 사람 ‘꼬시는’ 거다.” 

고란 기자

◆민간 근무 휴직제=공무원이 일정기간 휴직해 기업체에 근무하는 제도. 2002년 말 도입됐다. 6월 말 현재 37명의 공무원이 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민간 파견 공무원 1호는 2004년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근무했던 신제윤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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