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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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좁은 나무계단이었다.나미라는 여자가 흐느껴 울었고 나는 어쩔줄 몰라서 엉거주춤 계단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여자 쪽으로 계단 서너 칸을 올라서서 속삭였다.
『아니 왜 그래요.…울지마세요.』 여자가 고개는 벽쪽을 향한채로 손을 뻗어서 내 손을 찾아 쥐었다.아마도 내가 자기를 내버려두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같았다.그리고 여자가 말했다.
『다 나 때문이에요.내가 나쁜 년이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여자는 훨씬 더 많이 취해있는 것 같았다.
『누구 때문은요.군대야 어차피 다 가야 하는 곳인 걸요 뭐.
』 그러면서 나는 두손으로 여자의 어깨를 감싸안고 카페 안으로모셔다가 다시 자리에 앉혔다.여자가 잠깐만요…잠깐만요…라고 중얼댔는데 내가 가지말고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인 것같았다.어쨌든 나는 탁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우 는 여자의 앞자리에 또 앉았다.
『달준씨는요…저 때문에 큰 상처를 입었을 거라구요…내가 죽일년이라니까요…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예요…정말요….』 『…손가락말인가요?』 나는 여자가 취한 걸 이용해서 바보같이 물었다.
나미라는 여자가 천천히 얼굴을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자는 아주 바보같은 표정이었고 추한 얼굴이었다.눈물과 콧물이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그래 손가락도 그렇구…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곤 여자가 다시 탁자에 얼굴을 묻었는데 더이상은 울지 않았다.여자의 울음 삭이는 딸꾹질 비슷한 숨소리가 차츰 잦아들고있을때 나는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이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세상에 왜들 저렇게 서로 어려워해야 하는 가 짜증을 내면서. 나미라는 여자하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녀가 준 편지에 봉투를 하나 더 덧씌워서 형에게 보내주었다.만약 그 편지 때문에 형이 치러야 하는 마음고생이 또 남아있는 거라면 차라리 전방에 갇혀 지낼때 치르는 게 낫겠다고나대로 생각한 결과였다.
수능시험이 끝난 그 늦가을 즈음부터 별의별 녀석들이 나타났다.한국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서둘러 미국으로 떠난 애들도 우리반에만 두명이나 있었고(남녀 1명씩)정구라는 웃기는 녀석 하나는나이트 클럽 웨이터로 나간다고 했다.그래서 학교 에는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푸석푸석한 얼굴을 내밀곤 하는 거였다.
어떤 녀석은 대학에는 들어갈 가망이 없어서 아예 직접 사법시험 공부를 준비한다고 마음 단단히 먹고 절로 들어가 버리기도 했다. 더 웃기는 일군의 아이들도 있었다.12월이 되고 그러니까 완전히 대학생인 것처럼 티를 내고 학교에 오가는 애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거였다.책가방을 들지 않고 일부러 책을 몇권씩만들고 다녔는데 그것도 무슨 대학교재같은 걸 보라는듯이 들고 다니는 거였다.진짜 웃기는 건,그렇게 하고 다니는 아이들 중에는진짜로 대학에 들어갈만한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웃기기보다는 어쩌면 애처로운 광경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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