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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청소는 어떻게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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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어느덧 한 해가 한 달만을 남기고 저물고 있다. 나날의, 달마다의 어떤, 요즘 말로 하면 ‘미션’ 때문에 종종걸음 하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훌쩍 한 해가 한 달만 남기고 다하게 된 것을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어떤 이들은 보람을, 어떤 이들은 안타까움을 느끼겠는데,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소 쓸쓸함을 느끼게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쓸쓸함은 나의 내면에 내재된 것일 텐데, 외향적이라기보다는 내성적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오래전부터 익숙한 정조다. 그래서 가령 어쩌다 좋은 일이 생기면 이 즐거움을 온전히 내가 가져도 되는 것인지 덜컥 걱정부터 하게 된다.

간혹 문단 사람들을 만나면 왜 시는 통 볼 수 없느냐고, 시는 안 쓰느냐고 말을 한다. 그럴 때마다 요즘 너무 힘들어 날마다 시를 쓰는 듯이 산다고 말은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변명은 아닌 것 같다. 엄살도 자주 하면 습관이 된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충실한 독자로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계속해서 좋아하는 김수영도 읽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김춘수도 읽고. 그 과정에서 나의 마음속에 어떤 것들이 다소 닳아서 좀 모난 데가 깎여 나가기를 바라게 된다.

시를 읽는 시간과는 달리 돌아서면 삶의 환경이 혼탁한 것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여기서는 언어적 환경만으로 국한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누가 멋진 미소를 지어 보인 것을 일러 굳이 ‘살인미소’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웬 ‘공신’(공부의 신)들과 무슨 무슨 폐인들은 그리 많은지.

여성의 몸매를 일러 지칭하는 무슨 무슨 ‘라인’들은 또 왜 그리 많은가. ‘얼꽝/얼짱’이란 표현은 그저 애교에 불과한 정도이고, 여기저기 들려오는 말이 무슨 ‘완소남’이니 ‘안습’이니! 과장되고 자극적인 언어 환경에서 벗어나기는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이런 자극적인 언어가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언어 훼손의 폐해는 우리들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자극은 보다 더 큰 자극을 불러오고 우리들의 심성은 나날이 황폐해지고만 있다. 언어적 혼탁은 내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어지럽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의 언어는 우리 마음을 맑게 하고, 혼탁한 생활 언어로부터 우리를 치유하는 거의 유일한 언어적 정화 요법이다. 거기에는 생존경쟁과 자기 과시에 안달하는 과장된 언어와 훼손된 언어가 들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우리를 깊은 사유와 자연의 아름다움 속으로 온전하게 데려가는 사랑의 말이 있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김수영의 ‘사랑’ 전문)

시의 언어는 이처럼 우리를 위무하고, 조건 없이 사랑을 준다. 한 편의 시는 빵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유용한 그 무엇도 만들어 낼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까?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으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혼탁한 곳에서 맑은 곳으로 움직이게 한다. 한 해가 다 하고, 또 계절은 깊어 가지만 이런 점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나에게 여러 이유로 윽박질러도 시의 언어는 언제나 고즈넉하게 생의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비록 시를 쓰고 있지는 못 하지만 내 마음의 시심은 마르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좋은 시를 읽고, 그 감동에 마음이 일렁이는 날이면 문득 시의 뮤즈가 나에게도 방문해 줄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마음은 어느새 내게로 와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지난 일 년 동안 여러 상념들로 상처받은 내 마음의 청소는 결국 시를 통해 하는 수밖에 없을 듯싶다. 그게 시인의 운명일지니….

정은숙 마음산책 출판사 대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