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팩스辭表와 投書풍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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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일은행의 윤순정(尹淳貞)행장의 사퇴가 또한번 「소문」의 해일(海溢)을 몰고 오고 있다.은행장,그것도 시중은행의 은행장 자리라면 절대로 비밀스런 등퇴장(登退場)이 있어선 안된다.알 수 없는 이유에 따른 은행장의 사퇴,그것도 고향에 내려갔다가 식중독으로 입원해 있는 은행장이 팩스로 사표를 냈다는 전말은 으스스하고도 지저분하다.은행장의 등퇴장이 밝은 무대 조명 아래서 당당하게 이루어져야 할 이유는 여러가지다.
은행은 공개 회사기 때문에 은행장 인사는 수많은 현재 및 잠재주주들의 이해가 걸려 있다.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중심기관이기 때문에 공개되지 않은 이유로 이뤄지는 은행장의 갑작스런 사퇴는 기업활동의 밑바탕에 불안을 준다.다른 금융기 관 직원들은소문을 추적하느라 일을 손에 잡지 못하고 있다.가장 중요한 것은 예금자들이다.자기가 돈을 맡긴 국내 최대 규모 금융기관인 시중은행장의 자리가 볼 수도,알 수도 없는 한 올의 소문만 남기는 이유 때문에 날아간다면 돈은 어 떻게 맡기며,더구나 돈의가치는 어떻게 믿을 것인가.
이번 尹행장의 사퇴도 일련의 집요한 투서(投書)전쟁의 결과였다는 점만은 점차 사실로 잡혀가고 있다.가장 안타까운 것은 오히려 이 점이다.투서라는 것이 횡행하는데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그 사회가 비밀사회이자 부패사회일 것이 그 조 건이다.혹시부패사회를 개조하는데는 내부에서 부패를 고발하는 이른바 「호루라기 부는 사람(whistle blower)」의 역할이 강조되기도 한다.그러나 이 호루라기 불기는 정당하고 온건하며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호루라 기를 불되 어둠의 망토를뒤집어 쓰고서 분다면 그것은 새로운 부패와 비밀주의,그리고 음해풍조의 만연으로밖에는 갈 데가 없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은행 안의 적대 세력이 어두운데서 찌르는 투서는 조직 자체를 결국 파괴한다.윗사람은 투서의 위협 앞에서 지휘력을 잃게 된다.은행을 파괴하고 금융산업을 파괴하게 된다.나아가 통화질서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이 점에서 사정(司正)은 투서,특히 무기명투서에 의존하는 안이하고 병적인 방법에서 반드시 탈피해 나와야 한다.우리 사회는새로운 합의된 권위를 세워나가야 하는 시대에 처해 있다.지금이라도 이번 尹행장의 사퇴와 관련된 경위는 공식 설명이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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