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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믈란과 프랑스, 그리고 세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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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불패신화의 프랑스 공공노조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뚝심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접하며 가믈란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이후 벌어진 논쟁 때문이다. 하이브리드 가믈란의 옹호자들은 그것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폭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토속음악에서 지역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와 정서를 제거함으로써 지역문화를 약화시킨다는 게 반대자들의 우려다.

둘 다 일리 있는 얘기다. 세계인은 물론 전통음악을 외면하는 젊은 세대에 호소력을 갖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개척하는 효과가 있는 반면 유행을 타는 상업음악으로 전락해 공동체의 가치를 전승·발전시키는 본연의 임무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지금까지 세계화, 특히 문화 분야에서의 세계화에 체질적으로 반감을 표시해온 근본적 이유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프랑스에서도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것을. 이번 지하철 파업을 보는 프랑스인의 태도에서 그런 변화가 여실히 느껴진다. 파업으로 불편을 겪는 출근길 시민들의 대답이 10여 년 전에는 이랬다. “모처럼 자전거를 타니 상쾌하고 좋은 걸요.” “그들을 이해해요. 언젠가 나도 파업할 수 있잖아요.” 그때 받았던 문화적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같으면 “자기 주머니 채우기 위해 시민을 볼모로 파업한다”고 분통을 터뜨렸을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 파리지앵들이 그랬다. 절대다수가 파업의 부당성은 물론 파업 지도부에 노골적 적대감을 드러냈다. 교통체증에 대한 신경질적 반응도 훨씬 날카로워졌다.

그만큼 여유가 없어졌다는 얘기다. 조짐은 진작부터 있었다. 카페가 사라지고 있는 게 그중 하나다. 1960년대 20만 곳에 달하던 카페가 이제 5만 곳도 안 된다. 노천 카페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책을 읽는 게 이제 사치가 돼버린 거다. 개를 좋아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인이지만 애완동물로 고양이가 개를 앞지른 지 오래다. 개를 산책시킬 만큼 한가하지 못한 탓이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세계화의 거센 물결이 놀기 좋아하는 프랑스인을 부지불식간에 무한경쟁으로 밀어 넣은 거다. 놀고 싶어도 등을 떼밀리니 놀 수가 없는 거다. 모두 이런 피곤한 삶을 사는데 공공부문만 현실을 거부하고 있으니 시민들이 열 받은 거다. 사르코지의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그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흘러가게 돼 있던 거다.

10년 전 리오넬 조스팽의 사회당 정부가 집권하고 유례없는 경제성장과 저실업을 이끌어냈을 때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말하는 프랑스적 가치가 “늑대와 양에게 모두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세상이 바뀐 걸 어쩌겠나. 이미 세계화된 세계 속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을 외치는 것은 청동 칼이 비인간적이라고 돌도끼를 갈고 있는 거나 다를 바 없는 것을.

프랑스 사람도 이제 안 거다. ‘프랑스 문화의 사망’이라는 타임지 최신호의 치욕적 제목을 읽고도 항변할 수 없음이 스스로 변화의 기회를 놓친 탓이라는 걸 안 거다. 지금은 남의 손으로 연주된 가믈란을 뭐랄 게 아니라 우리의 가믈란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다듬고 살찌울지 고민할 때라는 걸 아는 거다. 우리는 아는지 모르겠다. 지금 프랑스의 고민이 남 얘기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