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라의KISS A BOOK] 철부지였다가 애늙은이였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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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내 속으로 낳은 아이지만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은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야.” 사춘기 초입의 아이를 보고 이런 생각 한두 번 안 한 엄마는 없을 것이다. 하루는 언제나 철이 들는지 한심하고, 또 하루는 애늙은이가 들어앉은 것 같아 섬뜩하다. 아이의 속을 방사선 촬영하려면 일방통행 엄마식 사고에서 벗어나 아이의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게 상책.

한스 도메네고의 『세 시 반에 멈춘 시계』(궁리)의 주인공 에버하르트는 고작 세 살. 코흘리개라고 얕봤다가는 어퍼컷 한 대 정통으로 얻어맞기 십상이다. 가슴 서늘하게도 만들고 요절복통하게도 만드는 녀석, 어떤 장난감보다 더 재미나게 어른들을 가지고 논다. 뇌스틀링거를 발굴한 에디터라는 작가 소개가 무색하지 않다. 입심은 뇌스틀링거와 비금비금하고 시치미 뻑 뗀 유머는 한 수 위다.

인간사 갈피갈피에 숨은 생의 페이소스와 아이러니, 무릎을 치게 만드는 통찰력이 사금파리를 빛나는 보석으로 둔갑시키는 6월의 햇살처럼 활자 위로 작열한다. 단순한 가족동화가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연상되는 적나라한 인간군상의 해부도다. 에버하르트의 장단에 웃다가 퍼뜩 생각해 보시라. “혹시 내 아이도 이렇게 순진무구한 얼굴로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나를 관찰·분석하고 있는 건 아닐까?”

머리칼이 쭈뼛 솟았다면 데버러 앨리스의 『엑스를 찾아서』(나무처럼)를 읽어보자. 불행과 열등감만을 안겨준 본명을 거부한 채 ‘카이버’라는 가명 속에 숨어버린 맹랑한 소녀의 세상읽기 리포트다. 스트립댄서 출신의 엄마를 바라보는 어린 딸의 삐딱하지만 감수성과 사랑 가득한 시선에 독자는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환경이 안 좋고 태도가 불량하면 무조건 ‘문제아’의 딱지를 붙여온 편견에 찌든 뇌세포가 반란을 일으킨 탓이다.

정학·퇴학·가출이라는 정형화된 성장 동화의 진부함으로 작품을 해석하면 곤란하다. 어쩔 수 없는 한계 속에서 그래도 저항하고, 도전하고, 또 부대끼고 넘어서는 인간의 이야기다. 그래서 카이버는 사랑스럽고, 오래도록 기억될 수밖에 없으리라.

대상 연령은 내시경으로도 안 찍히는 속내를 꽁꽁 숨긴 13세 이상의 어린이와 내 아이가 철딱서니가 없는 건지, 없는 척하는 건지 아리송한 엄마들.

임사라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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