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비열한 뉴욕 뒷골목 … 욕망의 비주류 한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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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유흥업소 영업이사가 퇴근길 총에 맞아 숨진다. 자동차 안에 숨어있다가 방아쇠를 당긴 범인은 불과 14세의 소년. 미성년자에게는 최고형이 구형되지 않는다는 점을 계산한 누군가가 살인을 시킨 것이다. 유흥업소의 이권과 상납금을 둘러싼 폭력조직의 갈등인 것 같다.

이런 시작을 보면 ‘웨스트 32번가’(22일 개봉·사진)는 암흑가, 혹은 조폭세계를 다룬,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온 낯익은 장르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묘하게 낯선 느낌이 있다. 바로 이 암흑가의 주인공이 모두 한국인, 더 정확히 말해 재미동포라는 점이다. 낯익은 장르영화에, 결코 할리우드 주류영화에서 볼 수 없는 인종구성을 등장시키면서 ‘웨스트 32번가’는 색다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낯선 영화가 된다.

살인사건 이후 이야기의 중심에 떠오르는 것은 두 명의 남자, 건달과 변호사다. 한국계라는 점에서는 같되 사는 세계는 전혀 다른 존재다. 건달 마이크는 죽은 전진호(정준호)를 대신해 영업이사가 되지만 조직의 핵심 권력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건달’보다 ‘애들’에 가까운 몇몇 소년들과 조직 내에서 비주류로 무리를 지을 따름이다.

변호사 존(존 조)은 로펌 내에서 출세할 욕심에 살인혐의로 구속된 소년의 가족을 찾아가 무료변론을 자처하고, 소년의 누나 라일라(그레이스 박)와도 가까워진다. 정작 사건 수임 이후 로펌 측의 계산이 바뀌면서 존은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그 역시 로펌이라는 주류사회에서는 비주류였던 것. 비주류라는 점에서 닮은꼴인 두 남자는 어느 순간 같은 편이 된다.

후반부의 전개는 언뜻 한국영화 ‘비열한 거리’를 연상시킨다. 중산층 모범생처럼 보이던 변호사 존과 거칠게 살아온 건달 마이크는 잠시 뜻이 통하는 듯싶었지만, 저마다의 야심을 한결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비열하고도 잔혹한 대결구도로 접어든다.

비주류에서 주류로 올라서려는 이들의 드라마에서 한국과 미국, 서로 다른 문화의 경계에 있는 동포들의 정체성에 대한 비유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영화의 제목은 실제 맨해튼의 한인타운이 자리한 주소. ‘웨스트 32번가’는 국내회사 CJ엔터테인먼트가 미국 스태프와 힘을 합쳐 미국 현지에서 만든 영화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교포 감독 마이클 강은 장편 데뷔작 ‘모텔’로 선댄스영화제에 진출했던 유망주다. 유머러스한 휴먼드라마로 알려진 전작과 사뭇 다른 이번 영화에서도 무난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특히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을 꽤 솜씨 있게 소화한다. 정작 총격전을 수습하는 과정은 다소 개연성이 떨어져 이 장르의 전형성에 익숙한 관객들의 눈높이에는 다소 못 미칠 듯하다. 비열한 배신의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마지막 장면 역시 좀 더 강력한 느낌을 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출연진 역시 정준호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계다. 국내 TV드라마·영화(‘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에서 활동 중인 김준성을 비롯, 저마다 배우로서의 매력이 고루 빛나는 것은 이 영화의 강점이다. 할리우드 영화(‘해롤드와 쿠마’ ‘아메리칸 파이2’)에서 코미디 연기로 이미 유명세를 얻은 존 조는 그와 정반대로 진지하고 냉혹한 역할에도 제법 잘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15세 관람가.

주목!이장면 변호사 존은 총격살인을 저지른 소년의 가족에게 변론 동의를 받기 위해 거듭 찾아간다. 소년의 누나 라일라는 그의 의도를 다소 의심하지만, 소년의 어머니는 이 동포 청년을 은인으로 여길 따름이다. 어머니의 강권으로 존은 뜻하지 않게 이 가족의 식탁에 함께 앉는다. 한국어를 못하는 존, 영어를 못하는 어머니, 그 사이에서 양쪽 말을 모두 하는 라일라가 어머니의 지극히 한국적인 감상을 가끔은 자의적인 번역으로 존에게 전한다. 교포로 살아온 이들의 다양한 경계성을 함축하는 장면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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