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몰릴수록 몸 사려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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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22면

요즘 ‘브릭스(BRICs) 펀드’가 러브콜을 받는다.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 여러 대륙의 국가에 나눠 투자하는 상품이다. 최근 해외펀드로 들어오는 돈의 70%는 브릭스 펀드가 빨아들인다. 한 달간 1조원 넘게 들어왔다. 올 들어 중국과 인도 주식이 무섭게 뛰어 주가가 기업실적에 비해 각각 55배와 23배 높게 거래되자 ‘경계 눈초리’가 생기면서 그 틈을 파고들었다.

장득수 슈로더 투신운용 본부장의 브릭스 펀드論

그중 영국계 슈로더투신운용의 브릭스 펀드가 으뜸이다. 하루 1000억원이 밀려든다.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회사의 주식운용본부장은 분산투자와 궁합이 잘 맞는 인물이다. 『투자의 유혹』이라는 책까지 쓴 ‘거품과 투기 분석’의 고수이기 때문이다. 장득수(46·사진) 본부장을 만났다.

전(錢)의 홍수 속에서도 그는 의외로 냉정했다. 대뜸 “한국의 펀드산업은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고 일침을 놨다. “1999년의 ‘바이 코리아’열풍 때도 돈이 왕창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열기가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그는 결국 주가가 조정을 받을 때 돈이 꾸준히 들어와야 ‘진짜’라고 했다. 요즘 ‘펀드 러시’를 보면 별다른 투자 안목 없이 남들이 대박을 냈다는 소문에 덩달아 들떠 가세하는 투자자들이 적잖아 보인다는 지적이다.

장 본부장은 “다른 회사에 있을 때 1000억원짜리 펀드를 굴려보는 게 꿈이었는데 정말 격세지감”이라고 했다. 그는 브릭스 펀드의 부상을 중국 펀드의 급성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봤다. “중국 주가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는 얘기예요.”

그러면서도 그는 “사실 펀드매니저도 급하게 모은 돈으로는 큰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조심스러워했다. 그러고 보니 중국 펀드와 미래에셋 인사이트 펀드는 물론 브릭스 펀드로도 쏠림 조짐이 보이는 형국이다.

장 본부장은 한 가지 사례를 들었다. 87년 미국에 일레인 가자렐리라는 애널리스트가 있었다. 그녀는 10월 19일의 블랙 먼데이를 나흘 전 족집게처럼 맞혀 스타가 됐고 독립해 투자자문사를 차렸다. 순식간에 돈이 뭉치로 몰렸다. 그러나 엄청난 돈의 홍수에 압도당한 데다 시장 안목도 흐릿해져 효율적으로 돈을 굴리지 못하고 결국 1년 뒤 비슷한 회사 중에서 꼴찌 성적을 냈다. ‘세기의 예언’을 한 고수조차 그랬다.

그러나 그는 신중론 속에서도 시장에 대한 ‘낙관의 끈’은 놓지 않았다. 다만 “분산투자의 묘를 적절히 살려야 실패하지 않는다”고 말에 힘을 줬다.

“신흥시장의 투자지도를 보면 크게 세 가지예요. 발전엔진에 따라 자원 주도형(commodity driven)인 러시아·브라질, 노동 주도형(population)인 중국·인도, 정보기술 주도형(IT)인 한국·대만으로 나뉩니다.”

이런 나라에 분산투자해야 승률이 높은데 브릭스 펀드는 자원과 인구형 두 부문에 고루 씨를 뿌린다는 얘기다. 중국·인도와 달리 덜 알려진 브라질에 대해 그는 “좌파적 정부가 부담스럽지만 경상수지 지표가 좋고 자원가격도 많이 올라 순항할 것”으로 봤다. 주가수익비율(PER)도 10배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러시아는 강력한 대통령 리더십과 풍부한 자원이 장점이지요.”

슈로더의 브릭스 펀드는 30명에 이르는 홍콩 리서치 본부의 도움을 받아 런던·홍콩·싱가포르 법인에서 종목을 고른다. 현재 국가별 투자비중은 중국(홍콩) 33%, 브라질 26%, 러시아 20%, 인도 10% 등으로 안배했다. 펀드평가회사인 제로인에 따르면 올 들어 수익률은 43%에 이른다.<그래픽 참조> 도이치·하나UBS·신한BNP 등 다른 운용사들의 브릭스 펀드도 40% 안팎의 성적을 거뒀다. 물론 수익률이 최고 70%에 이르는 중국 펀드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장 본부장은 “목표수익률을 올해처럼 높게 기대하면 큰코다친다”며 “금리에 연 5%포인트를 더한 수익률이면 훌륭하다”고 했다. 강세장일 때도 15~20%의 수익률로 만족하라고 했다. 사실 해외의 유명한 펀드매니저에게도 통용되는 기준들이다.

최근엔 분산투자를 위한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오일 머니의 수혜가 예상되는 이집트·모로코에 투자하는 JP모건의 펀드는 3개월 수익률이 15%였다. 중국 펀드의 3개월 수익률이 20~30%임을 감안하면 만만치 않은 성과다. 도이치투신의 포스트 일레븐 펀드는 골드먼삭스가 브릭스에 이어 차세대 성장국으로 지목한 인도네시아·터키·태국·아르헨티나 등 11개국에 투자한다. 유릭스(EURICs·동유럽+인도+중국에 투자) 펀드와 코친디아(한국+중국+인도), 코아아시아(한국+중국+일본+인도)에서 돈을 굴리는 상품도 나왔다.

장 본부장은 “신흥시장은 그동안 ‘생산기지’쯤으로 여겼지만 서서히 ‘소비기지’로 뜨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고 했다. 중국의 소비시장 부상을 주시하는 에셋플러스 투자자문의 강방천 회장과 비슷한 시각이다. 또 장 본부장의 분석에 따르면 선진국 시장과 신흥시장의 흐름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나타내는 상관계수는 올 초 0.95에서 현재 0.76으로 낮아졌다. 경기침체 우려가 나오는 선진국 증시와 차별화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야기를 마칠 무렵 장 본부장이 “원래 저는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어느 날 과거의 투기사례를 읽고 충격을 받아 연구에 매달렸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튤립에서 금·주식으로 투기대상만 바뀔 뿐이죠.” 그는 “투기와 거품붕괴의 교훈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장세 대응법이 천양지차”라고 했다. “물론 장기투자가 중요하지만 남 따라 돈을 묻어놓고 ‘나 몰라라’ 방치하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투자액을 지역별로 안배한 뒤 반기에 한 번 정도씩은 수익률과 시장전망을 따져보고 투자 보따리를 조절하는 게 좋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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