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문화시평>"土地"의 문화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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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원주(原州) 단구동 박경리(朴景利)여사 집 앞마당에서 펼쳐진『土地』완간 기념 잔치를 보면서 정말 우리도 살만큼 되었다는 자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남의 경사를 축하할만큼 마음의 여유가생겼고 남이 이룩한 장한 일을 보면 서 너시간씩 자동차로 달려가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수 있는 넉넉함도 생겼음을 실감케하는자리였다.기념 잔치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이 사회가 더욱 다양화해졌고 심화되었다는 느낌도 든다.보통 출판기념회라면 몇몇 문인들끼리의 만남으로 끝났을 텐데 이번 잔치는 문학 밖의 사람들이 더 많았다.가정 주부에서 대학생까지 참여해 우리 문화의 폭과 깊이가 더욱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최근 문화 예술에 대한 욕구와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있음을 여러모로 확인한다.앤디 워홀전이 한달 넘게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휴일의 진시황전을 보려면 줄을 서 기다리는 성의가 있어야 한다.휴일이면 고속도로를 메우던 자가 운전자 들이 이젠 가볼만한 곳을 다 가본 탓인지,길이 막혀 못갈바에야 전시장.음악회나 가보자는 방향전환 탓인지,의식(衣食)이 족하고 여유가 생기면 문화적 욕구가 늘어나는 당연한 이치 탓인지,지금 우리 사회에서의 문화적 수요와 갈망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土地』1부가 발간된지 20년이 넘는다.어째서『토지』는 이처럼 긴 세월 독자의 애정과 관심을 끌 수 있었고 그 작품의 완간을 기념하는 날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문화 이벤트를 벌이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고 있는가.원주 가는 차 안에서 동승했던 박범신.김성동.김사인등 세명의 문인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한 작품에 25년이라는 세월을 바쳐 일생일업(一生一業) 종사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왜 성철(性徹)스님이 그토록존경받는가.한눈 팔지 않고 8년 면벽 (面壁)참선하며 불경을 연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구도자적(求道者的)치열한 작가정신이 독자를 감동시키는문화현상을 몰고 온다는 사실을『토지』를 읽으면 알게 된다.작가박경리의 얼마 안되는 시(詩)중에「사마천」이라는 게 있다.「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긴 낮 긴 밤 을/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글을 썼던 사람/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작가는 이 시속에서 사마천(司馬遷)과 비슷한 인생의 한(恨)을 품으며 투철한 역사가적 자세로 소설『토지』를 쓰고 있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중국(中國)역사가 사마천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돼 궁형(宮刑)을 받은뒤 울분과 통한의 삶을 살면서『사기(史記)』라는 불후의역사서를 남긴다.작가 박경리가 사마천에게 보이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한은 무엇인가.그녀는 6.25로 남편을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렵게 외동딸을 키운다.이 딸이 시인 김지하와 결혼하면서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게 되고 3대 청상(靑孀)이 살아가는 고달픈 나날을 겪는다.옥바라지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한은 사마천의 궁형과 다를바없었을 것이다.
전쟁과 군사정권 아래서 겪는 작가 개인의 참담한 삶을 개인의불평과 불만으로 끝내지 않고 시대의 한과 서러움으로 승화시켰다는데 작가의 위대함이 있다.작가 자신의 찢기고 고단한 삶을 그나마 지키려 했던 이유가,3백여 등장인물을 동원해 우리 현대사의 고달픈 삶과 그 극복의 생명력 넘치는 의지를 시공(時空)을뛰어넘어 오늘 우리의 삶으로 환치시키는 역사가적 사명의식에 있었을 것이다.이제 그 집념의 노력이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에『土地』와 박경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그치지 않는다고 본다.오늘우리 사회에 문화 예술에 대한 강한 욕구가 일어나고 있지만 경박하고 뿌리없는 문화,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소모적 낭비 문화가 판을 치고 있을 뿐이다.때로는 편향된 이데올로기와 주의 주장에 얽혀 문화현상이 왜곡되기도 하고 때로는 후기산업화시대의 인스턴트 문화가 앞서가는 문화처럼 과장되기도 한다.지금 새롭게일어나는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를 바로 수용하고 바로 접근하기 위해서도 박경리같은 투철한 작가정신,넉넉함과 관용을 지닌『토지』같은 예술작품을 둘러싼 일련의 뜨거운 문화열기는지속적으로 확산돼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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