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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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그러다가 둘 중의 하나라도 빠져 죽으면 어떡하구…?』 상원이가 드디어 한마디했다.영석이의 아이디어가 상원이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죽음을 겁내서는 안된다잖아 짜샤.
』 승규가 말하고는 낄낄거리는데 영석이가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선착장 근처라면 물이 깊지도 않아.거기선 사실 죽고싶어도 죽지 못한다니까 그러네.일단 같이 물에 빠졌다가 나오면 그때부턴 벌써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니게 되는거 아니겠어.일단 방에 들어가서 옷을 말리면서… 그 다음부터야 뭐… 재주 껏 상원이 니가 하기 나름일 거라구.』 영석이의 제안은 우리 악동들 모두에게 아주 매력적인 것이었다.일단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헤어졌는데,각자 집에 가서 하루씩 자고 난 다음에는 마음들이 변한 것 같았다.마치 밤늦도록 쓴 연애편지가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도저히 부칠 용 기가 나지 않듯이.
우리는 결국 물에 빠지는 자작극을 포기하고 정통 송별식을 추진하기로 했다.상원이네 식구들이 마침 주말에 모두 집을 비운다는 거였다.상원이네 집 뜰에다 음식을 차리고 정식으로 정화를 초대하기로 했다.섭외는 영석이가 맡았다.영석이는 민경이를 불러내 정화에게 우리들의 진심어린 초청의사를 전달했다.정화를 미국에 그냥 보내기가 뭐해서 우리가 자리를 마련했는데 서울에서의 고교생활을 마감하면서 좋은 추억만들기가 될 것이다…라면서,특별히 순수하고 건전한 우정을 강조했다고 그랬다.
정화가,고맙지만 6시는 안되고 6시 반이라야 되겠다는 조건부참석의사를 알려왔을 때부터 상원이는 벌써 제정신이 아니었다.정화가 상원이의 일편단심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상원이네 집에서 차리는 자리에 참석하겠다는 건 상원이에 대한 어 느정도의 호의를 드러내는 거라고 상원이는 생각한 거였다.
헬렐레한 표정의 상원이를 보는 것이 좋아서 우리도 파티를 준비하면서 기분이 좋았다.테이블보 대신 탁자 위에 문방구에서 사온 모조지를 깔고,중국집에서 요리도 몇개를 시켰다.소주 대신 샴페인과 와인을 사왔고,승규가 솜씨를 뽐내며 부엌 에서 샐러드를 만들었다.수저를 테이블가에 주욱 늘어놓고 기다리는데 6시40분쯤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정화와 민경이 그리고 이름도 잘모르겠는 계집애까지 셋이었다.
상원이와 정화는 같은 반에서 2년을 지냈으면서도 직접 별로 말해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얼마동안 어색했었다.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서로 함부로 말을 못걸게 된다는 걸 아는 우리는 그애들을 이해했다.그렇지만 정화가 떠나는 마당이었 다.더 이상 줄다리기를 할 시간도 없었다.달은 초생달이었고,상원이가 기타를퉁기면서 먼 달을 바라보면서 노래 부르는데 우리 악동들까지 마음이 찡하고야 말았다.정화는 가만히 고개숙이고 있었다.
…시간은 조금씩 우리를 갈라 놓는데/어디서부턴지 무엇 때문인지/작은 너의 손을 잡기도 난 두려워/멈추고 싶던 순간들 행복한 기억/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던 너를/이젠 나의 눈물과 바꿔야 하나/숨겨온 너의 진심을 알게 됐으니/사랑 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날 보는 너의 그 마음을 이젠 떠나리/나 자신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널 아끼던 내가 미워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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