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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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그 가을에 있었던,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억해둘만한 일이 하나 있다.상원이와 정화의 삼빡한 러브 스토리가 그건데,우리는 거기에서 무언가를 하나쯤은 배울만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게 그즈음의 상원이가공책의 아무데나휘갈기는 구호였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은… 상원이에게는 유난히 썰렁한 가을이었을 것이다.
1학년 초 상원이의 눈에 정화가 처음 들었을 때부터 상원이의마음은 확실했다.바로 쟤다.그래서 다른 악동들도 정화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는데,솔직히 말해서 다른 악동들은 여전히 정화의 매력이 무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보통 보다 약간 작은 키에얼굴이나 용모가 남달리 빼어난 것도 아니었다.게다가 정화는 늘엄숙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우리하고는 어딘가 다른 별세계에 사는 계집애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원이에게서 우직함을 뺀다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거였다.상원이는 지난 두 해 동안 정화가 어떤 희망적인 반응을 내보이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화의 남자임을 자임해왔는데,그랬는데 정화가 미국지사로 발령난 아버지를 따라 미국 으로 떠난다는소식을 접한 거였다.우리는 상원이에게의 이번 가을이 얼마나 썰렁한 것인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영석이가 긴급 전략회의를 소집해서 악동들 넷이 신촌역 앞의 포장마차에서 드럼통을 둘러싸고 앉았다.상원이는 냅다 소주만 들이켜고 있었다.정화는 보름 뒤면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상원아 임마,그런다고 어쩔 수 없는 게 어떻게 돼냐 새끼.
』 승규였다.상원이의 낙서를 우리가 다 훔쳐봤으며 니 새끼 마음의 썰렁함을 우리도 다같이 실감하고 알고 있다는 걸 상원이에게 통보한 셈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어쩌고 싶다는 건지 말해봐 짜샤.길이 있을지 아냐.』 내가 그랬다.어쩔 수 없는 건 없다.이게 우리에게더 어울리는 구호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상원이는 눈만 크게한번 떠 보이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 봐,적장을 잡으려면 적장이 탄 말을 잡으라고 했어.』계집애 문제라면 도사라고 자처하는 영석이가 계속했다.
『내가 민경일 불러낼게.정화하고 같이 나오라고 해보지 뭐.그다음엔 상원이 니 마음대로 해보라구.됐지.』 『같이 나오면 둘이 안 떨어질려구 그럴테니까 상원이가 아무 말도 못할거라구.그것두 문제지.영석이 니가 민경일 책임질 수 있어…?』 『아냐,좋은 생각이 있어.한강에 가서 보트를 타는 거야.계집애들끼리 타겠다고 그럴 리는 없잖아.
이인승이니까 상원이가 정화와 단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잖아.상원이 니가 무슨 말을 하든 정화가 중간에 가버릴 수도 없구 좋잖아.』 승규와 내가 아이디어를 냈는데 영석이가 상황을 더 발전시켰다.
『야 좋은 수가 있어.보트를 타다가 선착장에 들어와서 내릴 때 말이야,상원이 니가 실수인 척 하고 일부러 발을 헛디뎌서 보트를 엎어버리는 거야.그래서 둘이 다 물에 빠지는 거야.걱정마.우리가 다 준비하고 있다가 구해줄게.그러면 둘 다 물에 흠뻑 젖어서 갈 데가 없잖아.우선 선착장에 붙은 방이라도 빌려서옷을 말려야 할 게 아니냐구.그러면 다 되는 거 아니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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