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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예비 후보론의 경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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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대통령 후보자 등록 마감일 후 5일부터 선거일 전일까지 여론조사에서 당선이 유력시되는 정당추천 후보자(여론 조사상 1, 2위 후보)가 테러 등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심신상실의 상태에 빠진 경우에는 해당 정당이 다른 후보를 내세울 수 있도록 대통령 선거일을 1개월 연기하여야 한다.’ 지난 5월 국회에 제출돼 계류 중인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의 핵심 내용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기어이 탈당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에 대해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최소한의 명분과 절차도 없이 정계은퇴 약속을 뒤집는 노욕”이라고 규정했다. 여권의 정동영 후보는 “옳고 그름의 기준인 양식과 사회적 통념인 상식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언론과 정치학자들도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보통 지식인으로서 필자는 이회창씨의 출마가 가당치 않다는 데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러나 괴팍한(?) 경제학자로서 필자는 이씨의 출마가 정권교체의 명분에 맞는 탁월한 선택이라고 판단한다.

우선 이씨는 “국민이 한나라당 후보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맞는 말이다. 불안한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명박 후보 개인에 관한 것이다. 여권이 예전부터 “한 방에 날릴 수 있다”고 큰소리쳤는데 대선 막판에 진짜 ‘한 방’이 나올지 모른다. 경선에서 석패한 박근혜 캠프를 포용하지 않은 것은 물론 점령군처럼 군림하려 듦으로써 유력 후보다운 국량(局量)을 보이지 못했다. 언행이 가볍다. 제일 중요한 경제는 제대로 챙길 것 같은데 이래저래 일반 국민이 보기에 불안하고 미흡하다.

다른 하나는 제도적인 문제다. 현행법에 의하면 대통령 후보자 등록 마감일 후 6일부터 선거일 전일까지 유력한 정당추천 후보자가 사망한 경우 새 후보로 바꾸어 선거를 치를 수 없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이 이런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앞에 소개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개정안이 테러행위를 조장할 수 있다(!)고 여당이 반대하고, 한나라당에서도 후보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 재수없고 방정맞게 여겨져 논의를 진전시키지 않은 채 계류시켰다.

정치권이 개정안을 반대하고 유보시킨 것은 크게 잘못됐다. 부모가 ‘나 죽기를 내심 바라는 거냐’고 못마땅해 한다고 부모의 생명보험을 들지 않은 것과 같다. 박근혜 의원의 테러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해괴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제도적 허점이 보완됐어야 했다.

허점이 보완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제학자인 서상목 전 의원이 주장한 “우파 진영도 비정상적 상황에 대해 복수후보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명제는 옳다. 이회창씨의 출마로 ‘비정상적인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든다. 두 후보 모두 테러 등으로 심신상실의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은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만의 하나 두 후보 모두 당한다면 여권이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선거를 강행할 수 없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차제에 큰 정치인으로 거듭나고 별다른 이변이 없으면 이회창 후보를 페이스 메이커로 삼아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다. 통합과 타협의 리더십으로 박근혜씨에게 당권을 주고 이회창 후보를 ‘잠재적인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며,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국민이 불안해 하는 개인적 문제를 완화시키는 것이 큰 정치인의 모습이다.

만약 이명박 후보가 낙마하고 대선 연기가 안 된다면 지난 대선에 흑색선전으로 분패한 이회창씨가 바통을 이어받으면 된다. 대선이 연기되면 박근혜 의원을 후보로 세워 이회창 후보를 다시 페이스 메이커로 쓸 수 있다.

1987년 대선의 두 김씨와 같이 2, 3등의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이 오면 3등이 용퇴해 단일화한다. 이회창씨는 출마선언에서 이런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보수진영이 전략적 마인드로 접근할 때 이회창씨의 출마는 무능정권의 재집권을 막는 보험이자 대선 승리의 꽃놀이패다.

안국신 중앙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