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 이공계 기피 이렇게 풀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이공계 기피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病理)를 보여주는 신종 증후군이다. 국가 과학기술 경쟁력의 근본을 뒤흔들고 있는 부정적 풍조에 대해 현장의 관련 당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공대 교수와 공대생, 고교 교사와 학생이 풀어 놓는 실태.고민과 나름의 해법을 소개한다.

*** 이공계 병역특례자 轉職 허용을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공계 기피'라는 말은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이공계의 위기는 양적으로 이공계 학생들의 수가 줄어들어 초래된 것도 있겠지만, 더욱 큰 문제는 우수 학생들이 공학.과학을 공부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 중 많은 수가 의대.치의대로 몰리는 것이다. 즉 '이공계 기피'가 문제가 아니라 '우수 인력의 이공계 이탈'이 문제다.

과거나 현재나 한국 산업의 핵심은 인적자원이다. 우리에게는 스위스 같은 관광자원도, 미국과 같은 광활한 농토도 없다. 오로지 사람만이 힘이다. 하지만 과거에 필요했던 '사람'과 현재에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다르다. 과거에는 저렴한 인건비가 경쟁력이었다. 적은 임금으로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이 한국 경제를 떠받쳤다. 하지만 지금은 우수한 기술인력이 경쟁력이 되어야 한다. 더 이상 품질관리.생산관리로 살아남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반도체.휴대전화.자동차.디지털TV를 팔아야 하는 것이다. 기술개발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지금 사회에서 우려하는 위기가 기회라고 느껴진다. 이 참에 이공계의 필요성을 정부가 절감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우선 이공계 학생들에게 병역 특례를 확대해야 한다. 지금 대부분의 이공계 학생들은 4~5년이나 되는 산업체 복무기간 중 단순 업무에 시달리기도 하고, 전직이 불가능하다. 산업체 복무기간을 줄이고, 전직도 자유롭게 해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등 좋은 병역특례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기술 연구 인력에 대한 처우 개선도 시급하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확률 게임을 한다. 확률적으로 의사가 되는 것이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기술.산업계에서도 그 분야의 일인자가 되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럴 수 있는 확률은 낮다고 생각한다. 산업계가 전체 기술 연구 인력에 대한 처우를 안정적으로 상승시키는 것은 물론 지적재산권 등 기술개발의 결실을 기술개발의 주인공에게 돌려야 한다. 또 우수 이공계 인력에 대한 장학금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현행 등록금 지원 외에도 생활비 등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정부 각 부처에 기술 전문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기술 전문인력만이 기술 발전 정책을 제대로 세울 수 있다.

이공계에서 석.박사를 딴 기술인력에게 행정 마인드를 심을 수 있는 교육 코스를 정부 차원에서 마련하고 이를 수료한 이들이 정부기관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한민구 교수.서울대 공대 학장

*** 홀대 받는 얘기 들으면 공학 공부하기 싫어져

이공계 기피는 뿌리깊은 기술 천시 풍조, 어려운 공부와 열악한 대우 등 여러 요인 때문에 생겼다. 대학에 들어와서 보니 공대 공부는 정말 어려웠다. 대학생은 공부를 안 한다고 하지만 공대는 하는데도 점수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외워도 점수가 안 나온다. 그래서 공부에 흥미를 잃어 수업시간에 자기 일쑤고, 1학기 마치고 의대.치대를 가기 위해 반수(半修)하는 학생들이 정말 많다.

이렇게 어렵게 공부를 하고 졸업해도 대우는 열악하다. 회사에 취직하면 인문계 출신과의 연봉차가 장난이 아니다. 공대 출신은 연봉 2천만원이 조금 넘지만, 인문계 쪽은 3천만원 가까이 된다. 선진국은 인문계보다 기술직의 연봉이 더 높다고 하는데… 대학원 가고, 석.박사까지 해서 연구직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청춘을 다 바쳐 공부해 취직해도 대우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연구직의 특성상 수명도 굉장히 짧다. 경기가 안 좋을 땐 구조조정당하기 딱 알맞은 자리다. 이러니 누가 이공계에 가려고 하겠는가.

이공계 나와서 연구원 될 정도가 아니면 기술직으로 취직해야 하는데 기업체의 어느 구석을 봐도 기술직을 필요로 할 것 같지 않다. 거기다 행정에 문외한이니 진급에서도 밀린다. 졸업하고 취직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로 힘들어 하는 것 같다. 나는 정말 공대 공부가 하고 싶어서 왔는데 이런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감이 없어지고 미래도 어두워지는 것 같다. 술자리를 가도 공대는 희망이 없다. "어디를 가나 힘들다. 어렵겠구나…열심히 해라…." 이런 말밖에 들을 수 없다. 친구들이랑 술 마시면서 "너 무슨 과 갈건데"라고 물으면 대답은 "나 아무데나 갈 거야…공부에 흥미가 없어." 이런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수능 시험날 반수한 친구와 식사를 하는데 "이번에 떨어지면 삼수한다. 의대 갈 거야"라고 했다. 그 친구도 처음엔 공대에 흥미를 많이 느꼈었는데….

옛날의 공대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 현실보다는 훨씬 좋고 편하게 생활했던 것 같다. 그때는 나라가 발전하던 기간이어서 이공계 학생이 많이 필요해서였나 보다. 지금 이공계를 무시하는 것은 "이제는 필요 없다"고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가에서도 이공계 기피현상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퀴즈 프로그램에서도 상금의 반은 이공계 장학금으로 빠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국가예산으로 지원하는 이공계 장학금 제도도 생겨 활성화를 시도하고 있다. 더 적극적으로 이공계 장려책을 펴야 한다. 기업에서도 이공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일자리 창출과 고급인력 채용에 신경을 써 줬으면 한다.

이규현 연세대 공대 1년

*** 차마 이공계 가라고 못해

우리는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흔히 우리나라는 자원빈국이라고 한다. 또한 세계 3위인 인구밀도는 더더욱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어렵게 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많은 인구는 단점이지만 장점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전 국민의 열성적인 교육열로 인해 우리에게는 신지식으로 무장한 고급인력이 풍부하며 이는 우리의 미래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상황은 이런 희망과는 점점 달라지는 듯하다. 계속 심화돼 가는 이공계 기피 현상은 학문과 사회의 균형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기에 충분하다. 본인이 담임했던 학생들 중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은 주로 인문사회계나 의약계열로 몰리고 있다. 심지어는 본인의 희망과는 반하게 주위의 분위기나 강요에 의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한 마디로 이공계는 비전이 없다고 보는 분위기다. 본인이 고등학생이던 20여년 전만 해도 우수한 학생들은 인문계와 자연계에 고루 분포했으며 자연계 안에서도 이공계와 의약계열로 균형있게 진로를 정하곤 했다. 하지만 현재 자연계열은 전체 수험생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으며 그의 절반 이상은 의약계를 희망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선택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첫째, 사회적 지위의 차이다. 후진적인 정치.경제.사회 구조에서는 조직보다 한 개인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되므로 개인에게 부와 권력이 몰리게 된다. 이공계는 그런 면에서 불리하다.

둘째, 경제적인 이유다. 같은 자연계 내에서도 의약계에 비해 낮은 보수 수준은 선호도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셋째, 신분의 불안정성이다. 특히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깨진 평생직장의 신화 앞에서 우리는 안정성을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공계 연구원은 가장 손쉬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현실에서 담임교사가 학생들에게 이공계 진학을 권유하기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21세기는 정보기술.나노기술.생명공학기술의 시대라고 한다. 이공계를 활성화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다. 인적 자원이 가장 소중한 자산인 우리나라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행히 요즈음 공무원 우선임용이나 이공계 대학생 장학금 지원 등 제도적 지원방안과 아울러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우리 국민이 인식하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이공계 전공자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위와 신분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제반 노력들이 계속돼야만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송용석 서울 명덕외고 교사

*** 화학科 가려다 취직 힘들까 藥大로 바꿔

나도 연구에 대한 꿈이 있다. 그래서 대학 원서를 쓰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화학을 깊이 배우고 싶은 욕심에 화학과를 생각하고 있었고 1학기 수시 원서를 쓸 때가 오자 부모님과 상의를 했다. 화학과를 지망해 보고 싶다는 나의 말에 부모님께서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다시 생각해 보란 말씀을 하셨다. 이유는 뻔했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나면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졸업 후 내가 전공한 화학을 살려 열심히 연구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다. 화학과를 나와선 교직이수도 되지 않아 교사가 되기도 힘들고, 더구나 경기가 안 좋아지면 구조조정당하기 딱 좋은 자리 또한 연구직이다. 이런 현실이라면 투철한 과학도가 아니고서야 이공계의 길은 피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약대였다. 내가 원하는 화학을 깊이 공부할 수 있고 졸업 후 어느 정도의 미래가 보장되는 곳. 그렇게 해서 나는 1학기 수시로 약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잠시 이공계를 생각했던 것도 금방 접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이과를 선택한 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해보았으리라 믿는다. 모든 이과생이 의대나 한의대를 꿈꾸진 않는다. 정말 어린이들이 과학자라 부르는 그 직업을 존경해 이과를 선택한 학생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가 이공계를 버렸기에, 그리고 이공계를 꿈꾸는 학생들 역시 사회의 일원임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공계 기피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은 사회의 꾸준한 관심이다. 현재 사회에 나갔을 때 보장되지 않는 미래가 이공계 기피의 가장 큰 원인이라면 국가적 차원에서 이를 보강해 줘야 한다. 요즘 이공계열로 진학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빈 자리를 채우려 하고 있지만 졸업 후의 상황까지 해결할 수 없다면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국가에서는 예산의 일부를 연구비로 써야 한다. 그러나 나라의 경제가 좋지 못해 지출을 막아야 할 때 제일 먼저 끊기는 것은 연구비다. 나라 경제에 상관없이 비용을 대달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희생양이 되게 하진 말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기초를 닦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공계는 모든 기술의 기초 학문을 배우는 곳이기에 가장 어려운 공부를 하고, 그만큼 우수한 지식의 인력을 배출한다. 꾸준하게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장려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기초공사 부실로 와르르 무너져 버리지 않을까.

이지선 경기 광명북고 3년(성균관대 자연계열 약학부 입학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