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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영화] '선동렬과 5·18' 대체 무슨 상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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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연출과 시나리오를 병행하는 김현석(35) 감독은 영리한 이야기꾼이다. 추억의 가요와 함께 떠올려지는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들의 얘기 속에 시대와 역사를 슬쩍 건드린다. 일제시대 국내 최초의 아마추어 야구단을 그린 데뷔작 ‘YMCA 야구단’(2002), 소심남의 어긋난 로맨스 ‘광식이 동생 광태’(2005), 신작 ‘스카우트’가 다 그렇다. 주인공 남자들은 전부 야구나 사진 같은 개인적 취미에 몰두하며 역사의 선봉에 서지 못했고, 사랑에도 서툴렀다.

하지만 섬세하고 유머러스하게 복기된 이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이들 또한 상처받으며 시대를 통과해왔음을 알게 된다. 한 번도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없었던 이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김 감독 영화의 주제인 것이다. 이처럼 정색하지 않고 개인사와 시대상황을 교직하며 유머를 섞어 딴청 부리듯 시대를 호출해내니 영리한 재주다.

‘스카우트’는 1980년 광주가 배경이다. 그러나 직설화법의 ‘화려한 휴가’와 다른 길을 걷는다. 광주와 야구라는 이질적인 두 키워드를 엮어 80년을 재구성한다. 새로운 어법의 ‘광주 영화’다.

주인공은 Y대 야구부 직원 호창(임창정). 광주일고 3학년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러 광주에 특파되는데 하필 5·18이 일어나기 10일 전이다. 경쟁학교인 K대와 숨바꼭질하듯 스카우트 작전을 펼치는 그는 옛 애인 세영(엄지원)과도 재회한다. 시민운동가가 된 세영은 7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호창을 떠났었다. 마침내 선동열 부모의 마음을 산 호창은 17일 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로 하는데, 세영이 경찰서에 연행됐음을 알게 된다. 또 7년 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게 된다.

영화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장르를 마구 오간다. 전반부 10일간의 스카우트 전쟁은 코믹스타 임창정의 장기가 잘 살아있는 코미디다. 호창이, 축구선수인 꼬마 이종범에게 야구를 권하는 대목에서는 절로 웃음이 터진다. 임창정과 엄지원의 로맨스 라인에는 엄지원을 흠모하는 동네 건달 곤태(박철민)가 코믹 감초로 가세한다. 브리사 자가용, 요금 10원짜리 공중전화기, 영화 ‘취권’ 포스터 등 꼼꼼하게 재현된 당시 풍경은 관객의 복고 취향을 건드린다. 얼핏 산만할 정도로 곁가지를 쳐가던 영화는, 호창이 7년 전 진실에 직면하는 후반부 마침내 정체를 드러낸다.

광주 출신의 김 감독은 소문난 야구광이다. 선동열의 광팬으로, 선동열의 자서전 중 “5·18 때 광주일고 3학년이었다”는 대목에서 시나리오를 탄생시켰다. 일제시대와 야구 ‘YMCA야구단’ 광주와 야구 ‘스카우트’를 교차시킨 감독에게 야구는, 시대와의 정면 대결 대신 취향을 쫓았던 개인주의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실제 ‘스카우트’의 첫 장면은 Y대 야구부의 대책회의인데, 마치 군부의 비밀 작전회의처럼 긴박감을 과장해 찍었다. 시대를 짓눌러온 정치과잉에 대한 풍자로 읽히는 장면이다.

호창과 선동열의 부모 등 세영을 제외한 모든 인물은 당시 시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듯 일상적 삶을 살아간다. TV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와도 “저 양반 축구 잘한다”, 최루탄 가스를 맡으면서는 “우리 최루탄 품질이 세계적이라 수출 잘 된다”고 태평한 소리나 늘어놓는다. 그러나 영화는 폭풍 전야인 5월 17일 밤 막을 내리며, 호창이 세영과 함께 5·18 현장에 남았음을 암시한다.

코믹 캐릭터에 날로 페이소스를 더하는 임창정은 순박하고 우직한 남성상을 무난하게 연기했다. 김 감독은 “코미디와 멜로적 느낌을 모두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남자배우다. 눈빛에 진정성이 있다”라며 캐스팅 이유를 밝혔다. ‘화려한 휴가’에 이어 또 한번 걸쭉한 광주사투리를 구사한 박철민, “운동권 여학생에 대한 딱딱한 이미지를 상쇄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대로 ‘뽀뽀 좋아하는 운동권’으로 설정된 엄지원의 연기 호흡도 좋다. 14일 개봉. 12세 관람가.

[주목!이장면]세영에 대한 일편단심을 ‘눈물의 비광’이라는 시로 지어 바친 곤태. “나는 비광! 고스톱에선 광 대접 못 받는 미운 오리새끼… 나는 비광! 광임에도 존재감 없는 비운의 광…”이라며 시를 읊는다. 김현석 감독의 감칠맛 나는 재기가 느껴진다. 엔딩 자막이 오를 때 ‘김엄박트리오’(김현석· 엄지원 ·박철민)의 경쾌한 노래로 들을 수 있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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