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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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하여간 도끼네와의 싸움으로 파출소에 앉아 있을 때에는 여러가지로 괜찮았다.학교 아이들이 파출소 밖에 몰려들어서 우리 악동들을 지지해주는 것에 우리 자신이 놀라고 말았다.아이들의 수는밤11시쯤까지 오히려 계속해서 늘어났다.파출소■ 경찰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만큼 성식이가 당한 일이 이미 우리학교 아이들 사이에 널리소문나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창 너머 아이들의 얼굴들 틈에 잠깐 하영의 얼굴이 보인 것 같기도 하였다.어느새 소식을 들었는지 성미가 먹을 걸 싸가지고와서 건네주며 울먹이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게다가 자정이 다 된 시간에는 교장선생님의 전화가 걸려왔는데,나하고 나눈 통화는 오히려 우리를 지지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달수? 그래 내가 다 들었는데… 사람을 때리고 그런 건 어쨌든 나쁜거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나도 너희 마음을 이해하니까… 잘 처리될 거야.내가 경찰서장님하고도 통화를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구 있어.
어쩌면 대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고 그랬던 것도,잡혀가고 고문당하고 그러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맛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지해주고 있다는 그 맛 말이다.
승규와 나는 그날 새벽에 승규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와서야파출소에서 풀려났다.도끼네의 치료비를 내주기로 합의를 봤다고 했는데,잘은 모르지만 공직에 있는 승규 아버지가 여러면으로 손을 써서 우리를 특별히 훈방해 준 거라고 했다.
나는 파출소를 나서기 전에 파출소장이라는 무궁화에게 강력하게항의하였다.도끼네에게 시달리다가 죽은 성식의 일을 말하고,경찰이 성식이를 지켜주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지적했지만,그 일과 이번 싸움은 별개의 사건이라고 무궁화는 말했다.
무궁화는 말하기를,성식이의 부모가 정식으로 고소해올 경우 그일을 경찰이 따로 조사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날밤에 승규네 집에서 승규와 같이 잤다.승규는 자기 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알고 보니 계부였다.승규는 그 아저씨에게 신세를 지게 된 것이 아주 기분 나쁘다고 말했다.승규는 또 말했다.
『내가 너희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착실히 공부만 하겠다고 그랬잖니.너흰 나를 우습게 봤겠지만 말이야,내가 자꾸만 말썽을 일으키니까 어머니가 저 아저씨에게 아주 꿀리는 것 같더라구.』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고,날이 밝아올 때쯤해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오후에야 학교에 갔는데,비록 공식적인 대접은 아니었지만 이건 완전히 개선용사 취급이었다.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은,학교부근에서 기생하는 깡패들 이야기를 하면서 용기를 내면 다 물리칠 수 있다고 강변하셨다고 했다.또 우리가 접한 정보에 의하면 교무회의 시간에는 체육선생님이,체육시간에 남학생들에게 유도를 가르친 것이 효과가 있었다고 큰 소리치기도 하셨다는 거였다.
그러나 며칠 지나자 불길한 소식들도 전해져왔다.도끼네를 비롯한 열네통 아치들이 복수의 일전을 위해서 이를 갈고 있다는 첩보였다.그게 현실로 다가온 건 우리가 파출소에 잡혀갔다 나온 닷새 뒤였다.
5교시가 끝나고였는데,아이들의 말을 듣고 교문 앞을 내다보니아주 험악한 아이들이 중무장을 하고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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