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 첫사랑의 그림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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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 12면

어떤 이들에게 80년 5월 광주는 역사라기보다 신화에 가까울 것이다. 자발적으로 조직된 시민군이 계엄군을 밀어내고 도청을 지켰던 11일은 제각기 다른 사연과 신념을 간직했을 개인들의 기억보다는, 그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독재에 저항했던 집단의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사람들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영화 ‘스카우트’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었듯 금남로의 인파 속에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보상받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혹은 친구를 버리지 못해 그곳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YMCA 야구단’ ‘광식이 동생 광태’의 김현석 감독이 연출한 ‘스카우트’는 잡다한 길을 걸어 마침내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는 영화다.

선동열을 잡아라!
80년 5월 7일 대학 직원 호창(임창정)은 라이벌 대학에 입학이 예정된 광주일고 투수 선동열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간다.
한때 야구선수였던 그는 여자친구 세영(엄지원)이 갑자기 이별을 통고한 다음 날 시합을 망치는 바람에 야구를 포기했다. 그 세영을 호창은 7년 만에 광주에서 다시 만난다. 그녀는 고향인 광주 YMCA에서 일하며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었다.

무인도로 전지 훈련을 떠났다는 선동열을 기다리다 심심해진 호창은 세영 주변을 배회하며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도 하고, 세영을 사모하는 건달 곤태(박철민)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한다. 그 한편에선 선동열을 숨겨 놓은 라이벌 대학 직원과의 신경전과 첩보전도 진행된다. 그러는 동안 광주의 정세는 차츰 불안해진다.

‘스카우트’는 “호창은 과연 선동열을 스카우트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시작되는 듯하다. 야구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답을 알고 있다. 선동열은 81년 고려대학교에, 영화의 표현대로라면 “안암동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카우트’는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있는 사건들의 힘만으로 지탱되는 영화일 것이다.

예정된 실패, 그 실패에 도달하기까지 호창은 무슨 일을 겪었는가에 관한 영화. 기승전결이 분명한 드라마틱한 구조를 구축하기보다 자잘한 에피소드를 배치하는 데 더욱 능숙한 김현석 감독은 광주에 계엄령이 선포되기 직전까지 며칠을 아기자기하게 이끌어간다.

호창이 축구 하는 꼬마에게 글러브를 주면서 야구를 가르치는데, 그 아이 이름이 종범이(광주 출신 야구선수 이종범)라는 설정, 곤태와 호창이 티격태격하는 에피소드, 호창을 서울로 보내버리기 위해 곤태가 선동열을 납치하려는 장면 등은 재치 있고 귀엽다.

매우 귀여운 영화들을 만들어 온 김현석 감독은 심지어 5월 17일에 곤태와 부하들이 시위대가 붙잡혀 있는 경찰서를 습격하는 장면마저도 코미디를 섞어놓았다.

하나의 이별, 두 개의 기억
이처럼 결말이 정해진 대신 ‘스카우트’는 미스터리 하나를 가지고 있다. 호창은 세영과 헤어지던 날을 이소룡이 죽은 날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세영은 73년 7월 20일을 다른 날로 기억한다. “오빠가 다른 사람처럼 보여”라고 말하며 울었고, 다시는 호창을 만나주지 않았던 세영. 그녀는 그날 무엇을 보았던 걸까.

‘스카우트’는 그 이별의 기억을 80년 광주와 연결시키면서 지금껏 광주를 다룬 영화들이 보아주지 않았던 한 청년의 모습을 응시한다. 남자다운 연대장이었기에 전두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청년, 독재 정권 하에서 대학 점거 농성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그저 선발 투수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기뻤던 청년. 광주 도청 앞을 메운 5월 17일 촛불 시위 인파 속에서도 오직 한 여자의 뒷모습만을 발견했던 청년. 그는 이미 몇 번이나 놓쳐 버린 연인의 손을 다시는 놓지 않기 위해 선동열을 포기하고 낯선 도시의 도로를 질주한다.

다소 산만하게 보였던 ‘스카우트’는 그 순간에 이르러 그다지 상관없는 것 같았던 며칠의 사건을 하나로 모아 밀어붙인다.
세영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우습지도 않은 시(詩)를 끄적였던 곤태는 지나치게 희화화되었던 캐릭터에서 필연성을 찾아내고, 여기저기 흩어졌던 에피소드와 암시는 5월 18일 전날 밤이라는 극적인 시간에 힘을 보탠다. 그리고 영화는 그 순간 끝이 난다. 광주민주항쟁에 진입하지 않은 채,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허우적대는 호창을 보여주지 않은 채.

잊혀진 사람들
그것이 단순한 회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인물들 때문이다. 세영을 제외한 이 영화의 누구도 박정희 대통령 암살과 서울의 봄,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겁이 나거나 신념이 달라 그 흐름에서 비켜서 있지 않고, 그저 관심이 없을 뿐이다. 호창은 선동열을 찾아 다니고, 곤태는 세영에게 몰두하고, 선동열의 부모(백일섭·양희경)는 자식의 앞날을 계획한다.

그것을 이기심이라고 욕할 사람이 있을까. 세영이 촛불 시위를 준비하기 위해 사들인 양초 수십 박스를 보며, 호창은 그들이 촛불을 켜고 자기 소개를 하던 MT를 기억해낸다. 남도 사투리를 수줍어하던 스무 살의 세영,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서로 뽀뽀해주기 놀이를 하던 치기 어린 연애의 나날을.

그리하여 ‘스카우트’는 어떤 대의명분도 아닌, 오직 첫사랑을 위해 광주민주항쟁으로 뛰어든 한 청년을 연민한다. 계엄군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가 닿고 싶어하는 연인을 안타깝도록 이어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손을 잡았던 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 날은 5월 18일이므로. 아마 그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희미한 그림자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을, 호창과 같은 사람들이. ‘스카우트’는 그런 역사의 여백을 발견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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