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배움에 대한 열정만으로 학사모 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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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 썩어갔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을 삭일 수가 없었어요."

9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2회 독학학위 수여식에서 행정학 학사 학위를 받은 정천수(44)씨는 다른 독학사 9백43명과 함께 학위 수여의 기쁨을 나눴다. 정씨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안산시청에서 의회 관계 업무를 맡고 있던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그에게 백혈병과 폐결핵이란 병마(病魔)가 동시에 찾아왔다.

그는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 썩어가는 폐를 떼어내야 했다. 그리고 동생의 골수를 이식받았다. 6년간의 투병 끝에 2000년 기적적으로 몸이 나아진 그는 "새로 주어진 삶을 뜻깊게 살겠다"며 독학사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병을 치료하면서 빈털터리가 돼 학원에 다닐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8만3천원에 산 독학사 교재에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이날 학위를 땄다. 경기도 안산시 사할린 영주귀국동포지원사업 소장(6급)직을 맡고 있는 정씨는 앞으로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동포들을 돕는데 일생을 바친다는 각오다.

여성 최고령자로 특별상을 받은 민경애(61)씨는 추계예술대 대학원 서양화 전공에 합격해 오는 3월부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민씨는 "여고를 졸업하고 결혼, 남편과 아이 뒷바라지에 전념하면서도 미대 진학의 꿈을 버리지 못해 꾸준히 그림 공부를 해왔다"고 말했다.

독학사 중에는 현역 시의회 의원도 눈에 띈다. 대구광역시의회 의원인 서보강(56.행정학)씨는 1965년 고졸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26년 만인 91년 독학사 제도와 첫 인연을 맺어 12년 만에 학사모를 쓰게 됐다.

서씨는 "지난해 한 과목에서 1점이 모자라 학위 취득에 실패했을 때는 참담했다"면서 "그래서 더욱 독학사가 값진 것 같다"고 말했다. 역시 고졸 학력을 검정고시로 따낸 뒤 수형생활 중에도 충북지역 전체 수석을 차지해 특별상을 받은 이모(39)씨도 학위 수여의 기쁨을 누렸다.

이씨는 "지난해 면회오셨던 아버지의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이 가슴 아팠다"며 "학위 증서와 상장이 효도가 될지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안겨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 병원에 입원하느라 또래들과 함께 공부하지 못해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따내고 내친 김에 대학 과정도 독학의 길을 걸었던 조민경(19.여)씨는 결국 남들보다 2~3년 먼저 학사모를 썼다. 조씨의 다음 목표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강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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