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석유 사회주의'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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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남미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석유 사회주의(oil-socialism)'를 실험하고 있다. 석유를 돈줄로 무상 교육.의료, 빈민구제 등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배럴(158.9L)당 100달러(약 9만원)에 육박하는 높은 기름값이 차베스의 버팀목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퍼주기식 정책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뉴욕 타임스 매거진이 4일 보도했다.

차베스는 남미의 독립 운동가 시몬 볼리바르의 정책을 계승한다며 '볼리바르 사회주의'를 천명한다. 국제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와 신자유주의를 배격하고, 남미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빈부 격차를 없애고, 밑으로부터의 참여민주주의를 꾀하고 있다. 그는 또 "예수는 최초의 사회주의자"라며 성경의 공동체적 이상을 꿈꾸기도 한다.

차베스는 이를 위해 석유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오일 달러를 활용할 뿐 아니라 중남미와 카리브해 국가들에 석유를 공짜로 주거나 낮은 가격에 수출한다. 의사와 군사 전문가들을 보내주는 대가로 쿠바에 하루 10만 배럴 이상의 석유를 주고 있기도 하다. 다른 남미 국가들에도 한 해 수백만 배럴을 원조하고 있다.

국내의 석유와 천연가스도 보조금을 줘가며 싼값에 묶어 놨다. 이 때문에 올해 신차 판매량은 45만 대로 4년 전의 4배 수준이다. 기름을 많이 먹어 미국에서도 인기가 떨어진 제너럴모터스(GM)의 대형 SUV 차량 대리점이 내년 초 6군데나 문을 열 예정이다.

차베스의 정책은 측근인 라파엘 라미레스 에너지석유장관이 사장으로 있는 국영 베네수엘라석유가 뒷받침하고 있다. 차베스가 1998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석유는 국민의 것"이라며 엑손모빌 등 다국적 기업이 보유한 지분을 강제로 매입해 만든 기업이다.

이 기업은 매출의 3분의 1을 국내외에 원조하고, 3분의 2는 시장 가격으로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전체 수출의 90%, 정부 예산의 50% 이상이 여기서 나온다. 이 회사의 수입이 차베스의 좌파 정책을 실현하는 실탄이다. 지난해 매출의 35%인 350억 달러를 정부에 지원했다. 이 중 140억 달러는 차베스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국가발전기금으로 들어갔다. 이 기금은 도로.철도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과 해외 원조, 그리고 빈민지역에 무료 병원과 학교를 짓는 데 쓰인다. 헬리콥터.잠수함 등 무기 구입에도 지출된다.

뉴욕 타임스 매거진은 "차베스가 원조와 사회사업에 몰두하느라 정작 돈줄인 유전의 개발.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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