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사로 변신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 첫 인터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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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03면

신인섭 기자

전 경기도경 대공분실장 이근안(70)씨. 과거 군사독재 시절, 김근태 의원(대통합민주신당) 등을 고문해 ‘고문 기술자’로서 악명을 떨쳤다. 10년10개월 도피 끝에 자수,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한 뒤 지난해 11월 7일 여주교도소를 나섰다. 당시 그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송구스럽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신앙(기독교) 생활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 이씨는 180도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교회와 교도소, 노숙자들을 찾아 종교를 믿게 된 계기 등을 간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는 애국이라고 생각…배신감 잊으려 신앙 선택”

지난 1일 이씨는 중앙SUNDAY와 첫 언론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내내 자신이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또 자신의 과거 행동이 애국심에서 출발했음을 내비치려 했다. 교도소에서 신앙을 갖게 된 계기부터 설명했다.

“교도소 운동 시간에 재소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저게 고문 기술자야’라고 수군댔어요. 내게 다가온 것은 바퀴벌레뿐이었어요. 애국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충신이 역적 되고, 역적이 충신 되는 이런 배신이 어디 있겠어요. 믿음의 세계에서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는 2003년 6월 옥중 세례를 받았다. 전립선 비대증으로 자주 소변을 보러 다닌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4평짜리 감옥에서 14명이 칼잠을 자는 상황에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한번 일어나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어요. 화장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공부했죠. 책장 넘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는 푸념을 많이 들었어요.”

이씨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교리별 성경연구’를 만들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매주 한 과(課)씩 1년에 걸쳐 공부할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를 6학기 만에 졸업했다. 홀로 교재와 씨름하고, 리포트를 작성해 등기로 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이씨는 2005년 2월 김근태 의원이 여주교도소로 자신을 면회와 화해한 것을 회상했다. 그리고 김 의원을 고문한 것에 대해 거듭 미안함을 표시했다. “제가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했지요. 이에 김 의원이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개인의 잘못이 아니지 않으냐? 나도 그만한 포용력이 있다’고 말했어요.” 이씨는 고문 당시의 상황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은 경찰 조직에 섭섭함을 표시했다. “애국이라는 것을 남에게 미룰 수 없는 것이어서 내가 했어요. 그러나 내가 은신해 있을 때나 재판 과정에서 (경찰) 윗선에서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이씨는 항간에서 제기하는 의혹과 달리 도피 생활 동안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고 서울 용두동 자택의 천장에 줄곧 숨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당뇨·고혈압·신부전증이 겹쳐 힘겹게 생활하고 있다. 빌딩 청소부로 일하는 부인 신모(69)씨가 받는 월급 30만원과 자신이 간증할 때 받는 사례비가 수입의 전부라고 한다.

그는 두 달에 한 번씩 옛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을 만난다. 밥 먹고 집안 대소사를 얘기할 뿐 정치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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