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83. 회고록을 마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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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75년 PET를 개발할 때 찍은 사진. 필자는 이 사진을 보면서 초심으로 돌아가 연구 열정을 불태운다.

내가 즐겨 쓰는 말이 몇 가지 있다. 학생들한테는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누가 내 연구 업적을 추켜세우면 “그때 그렇게 했을 뿐이다”라는 것이다. 내 업적을 아무리 자화자찬해봐야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뿐이다. 그 또한 앞선 연구자들의 업적이 없었다면 나 혼자서는 작은 연구 성과도 거두기 힘들었을 게 뻔했다.

 뇌과학연구소가 본격 가동된 지 1년여가 지난 지금, 연구소에는 활기가 넘치고 있다. 세계 대부호들이 주로 간다는 병원인 미국 메이요클리닉을 비롯해 하버드대, 세계적 의료장비 업체인 독일 지멘스 등의 연구진들이 공동 연구를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뇌과학연구소를 찾아오고 있다. 뇌과학연구소가 설립되기 전에는 한국 어느 대학, 어느 연구소에서도 볼 수 없었던 분위기다. 전 세계 뇌 영상 연구소와 의료장비 회사들이 뇌과학연구소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뇌과학연구소에서는 첨단 뇌 영상시스템 개발과 함께 뇌 영상 교과서를 새로 편찬하고 있다.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부분에서 혈관까지 자세하게 나오는 새로운 ‘뇌지도’가 올해 안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조만간 의학도와 의사들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선명한 뇌 영상 사진으로 뇌의 구조를 보며 배우고, 수술 계획을 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대학에 할 말이 많다. 대학들이 뇌과학연구소와 같은 혁신적이고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연구소를 많이 만들어 육성해야만 우리나라의 장래가 밝다. 이제 국내에서 1, 2등을 다투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글로벌 시대다. 세계 제일이어야 하며 세계 최초여야만 한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 없이는 우리나라 과학은, 또 우리나라 학문을 대표하는 대학들은 세계 속에서 서서히 없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뇌과학연구소를 국가 지원 없이 순수하게 사재 및 재단 돈 수백억원을 들여 세운 이길여 회장과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도와준 길재단 이철옥 고문과 같은 미래를 보는 지도층 인사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지금까지 나는 70여 평생을 사건 또는 에피소드 위주로 소개했다. 나는 과거를 잘 돌아보지 않지만 막상 회고록을 연재하면서 이렇게 빨리 세월이 흘렀는지 새삼 느꼈다. 앞만 보고 달리는 나의 수레바퀴에 치여 때로는 길 옆으로 나가 떨어진 사람도, 주변을 잘 관리하지 않는 나의 생활 방식에 서운해 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은 되돌릴 수는 없다. 나는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발걸음으로 나아가고, 생애 마지막까지 과학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체의 마지막 미답 부분인 뇌의 신비를 벗기는 데 일조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연구소 문을 들어선다.

 40년의 연구생활에 많은 도움을 준 선생님들, 동료들, 제자들 그리고 특히 최근 내 생애 최고의 드라마를 만들어준 이길여 회장, 이철옥 고문에게 감사한다. 내가 구술하는 인생 역정을 정리해준 중앙일보 박방주 과학전문기자와 25년이 넘은 KAIST 시절의 많은 사진을 찾아준 KIST 이순재 영상 담당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끝>
조장희<가천의과학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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