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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바둑칼럼>서양바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서양에 바둑을 보급해온 양대산맥은「日本棋院」과「應昌期바둑기금」이다.이 두곳이 동양의 바둑을 서양에 심어온 가장 열렬한 전도사들이고 韓國은 鄭壽鉉8단,千豊祚7단등 몇몇 개인들의 노력이있었을뿐 이 방면에선 거의 무임승차해 왔다고 볼 수있다.
바둑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은 이미 50여년전부터 문화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서양에 씨를 뿌렸다.그리하여 서양의 바둑용어는 하네.우테카시등 일본원어로 대부분 굳어졌고 모든 바둑관계 서적은 일본의 바둑역사를 중심으로 기술되어왔 다.
대만 재벌 應昌期씨가 설립한 應昌期바둑기금은 「應씨룰」로 세계바둑룰을 통합한다는 특이한 목표아래 불과 6년전에 출발했으나막강한 자금력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세계최대의 프로대회인 應昌期배 외에도 세계청소년대회.세계컴퓨터바 둑대회등을 주최하며 應씨룰의 합리성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서양 최초의「棋院」은 韓國人이 세웠으니 그 주인공이 바로 林甲이란 인물이다.아마4단 실력으로 경기고등학교 독일어교사였던 林씨는 60년대중반 파리에 유학갔다가 바둑전도를 결심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서양인이 볼때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기원간판을 내걸게 된 것이다.
처음 林씨는 奇人이요 무적의 바둑고수였고 점차 무수한 제자들의 추앙을 받는 바둑교주가 됐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자 명문 파리대학의 수재였던 앙드레 무사6단이 프랑스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면서 林씨의 클럽은 인기를 잃고 낙조를 맞게된다.林씨는 한국기원에『프랑스에 와 살고싶은 프로나 아마고수 한사람을 찾아봐달라』고 구조 신호를 계속보냈으나 여기에 응한 사람은 없다.
『르몽드지는 반드시 바둑을 연재할 것이고 적임자는 나밖에 없다』던 林甲씨는 아직 소원을 이루지 못했으나 70의 노구를 이끌고 지금도 바둑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이다.
李昌世5단.그는 62년과 63년,당시 무적이던 趙南哲9단의 國手位에 도전하여 패한 뒤 독일 함부르크로 유학하더니 사업으로방향을 바꿔 크게 성공한다.78년 韓獨문화협회장이 된 그는 첫사업으로 한국의 프로기사들을 초청했고 이로써 한 국바둑은 처음으로 유럽일대에 소개됐다.
나체촌으로 이름높은 유고의 휴양지에서 한국프로와 중국고수들이최초로 조우한 것도 이무렵이었고 바둑이 서유럽은 물론 舊소련.
체코등 당시로서는 「철의 장막」이었던 지역에서 멀리 아이슬란드까지 퍼져있다는 사실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첩보 영화속에서만 보던 으스스한 공산국가 東獨.이곳에 갔던 高在熙7단등 프로와 아마들은 李昌世씨의 차를 타고 가다 대형교통사고가 일어나 상대쪽에 사상자가 발생하자『우리는 죽었구나』생각했다고 한다.
무과실판정으로 벌금만 물고 풀려나자 행여 마음이 변할까봐 전속력(?)으로 東獨을 빠져나온 일은 이 시대 특유의 에피소드로남아있다.
86년 샌프란시스코.金寅9단과 曺薰鉉9단은 중국의 섭衛平9단과 이곳에서 최초의 韓中교류전을 열었다.당시 샌프란시스코市는 이날을 「바둑의 날」로 정했고 이때부터 이곳 바둑클럽은 공공건물을 무료로 사용하며 미국최강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고 한다.한국바둑은 70~80년대 미국.유럽은 물론 국교가 없던 공산국가들과도 꽤 왕성한 교류활동을 했으나 韓國棋院의 체계적인 지원이없어 지금은 유럽을 찾는 프로기사들이 거의 없다.이 바람에 金寅9단.千豊祚7단등은 사재를 털어■ 했던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했다.세계최강이 된 한국바둑.이제는 보급쪽에서도 뭔가 달라져야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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