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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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3.실종 ○43 여기가 어딜까….
눈을 떴는데 도통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나는 소파에 웅크리고 잠들었던 것 같았다.손을 뻗으니 베개가 소파 아래에 있었는데 아마도 누군가 내 머리에 받쳐준 것이 굴러떨어졌나 보았다.목과 허리가 뻐근했고 갈증이 났다.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베란다의 창유리로 뽀얀 달빛이 새어들고 있었는데 그래서 겨우 사물의 윤곽이 드러나 보일 뿐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아니 가만히 귀기울이니까 어디에선가 멀리 자동차가 아스팔트를 질주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하여간 그런 소리는 아주 깊은 새벽에나 들리는 소리였다.
손목시계를 보니까 네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열일곱 살 생일선물로 어머니가 시계를 사주겠다고 했을 때 역시 야광시계를 고집하기 잘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소파에 일어나 앉았다.주머니를 뒤졌더니 담배는 있는데 불이 없었다.나는 한동안 빈 담배를 입에 문 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한번 사방을 둘러보았다.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더니 아파트 단지였다.저 아래로 빈놀이터가 보였고 빈 그네와 빈 미끄럼틀과 빈 시소가 보였다.가로등이 쓸데없이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놀이터 옆에는 텅빈 테니스장이 있었다.
건너편 아파트의 세 구멍에 불이 켜져 있었다.가족중의 누가 갑자기 아프거나 아들중의 누가 손가락을 잘랐거나 아니면 신혼부부의 침실이거나 그럴 것이었다.
어린시절 학교에서 무슨 상을 받거나 해서 서둘러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을 때,그래서 거실 마루의 한가운데에 털썩주저앉아서 막연히 식구중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처럼,그렇게 막연히 외롭다고,나는 새벽 네시의 낯선 아 파트 단지를 내다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창에서 돌아서서 부엌쪽으로 갔다.냉장고를 열고 생수를 꺼내서 마개부분에 입술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냉장고 불빛으로 부엌의 스위치를 찾아서 불을 켰다.그리곤 부엌옆의 방문 하나를 살며시 열어보았다.침대에 여자가 하나 잠들 어 있었는데잘 보니까 계희수였다.솔직히 말한다면,계갈보는 아주 자극적인 자세를 하고 잠에 빠져 있었다.
『아냐,정말이라는 거야.준철이가 그러는데 자기네 동네 슈퍼에서 봤다는 거야.계갈보가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말이야,어떤 대학생놈 하구 팔짱을 끼고 반찬을 고르고 있더라니까 그러네.』 『넌 글쎄 소문은 소문으로 삭일줄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거라니까….』 어쩌구 저쩌구 주고 받다가 누군가가 계갈보에게로 가서 우리 자리로 불러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계갈보는 우리를 보고손을 내밀어서 하나씩 악수를 나누고는 반가운 얼굴로 우리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영석이가 몰아세웠다.
『우린 내기를 했는데… 난 말이야,니가 어떤 대학생인지 하구같이 산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닐 거라는 쪽에 걸었어.』 『뭘 걸었는데…?』 계갈보는 놀라지도 않고 말을 받았었다.
『너하고 춤을 추기로 했거든.이기는 놈이.』 『그렇다면 넌…다른 파트너를 구해야겠어.』 나는 살며시 방문을 닫고 돌아와 소파에 주저앉아서 고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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